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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6 05:00 수정 : 2018.05.26 10:29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재결성 뒤 2011년 내한공연 때 모습. 에이엠지글로벌 제공
소싯적에 음악 좀 들었다는 아재들 중에 엑스재팬(X-Japan)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그룹은 몰라도 그들의 메가히트곡 ‘엔드리스 레인’ 정도는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일본 문화가 엄격하게 차단되었던 1980년대, 90년대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지금 아사다 마오 급의 인지도를 쌓았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엑스재팬의 주축은 드러머 요시키와 보컬리스트 도시(토시), 두 명이다. 무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록음악을 좋아하던 단짝 친구였던 둘은 중학교에 들어와서 스쿨밴드를 결성한다. 학업을 마치고 도쿄로 건너간 둘이 결성한 밴드가 엑스재팬이다. 원래 그룹 이름은 그냥 ‘엑스’였으나 같은 이름의 미국 밴드가 있어서 나중에 ‘재팬’이 붙었다는 여담도 있다.

요시키와 도시 두 명 외에 다른 멤버는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바뀌었는데, 그중에서 몇 명은 언급할 만하다. 먼저 베이시스트 다이지(타이지). 실력도 대단하고 인기도 엄청났다. 그에 따른 해프닝도 있었는데, 서태지가 다이지를 너무 좋아해서 이름을 태지로 짓고 영문으로는 똑같이 ‘Taiji’로 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관계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검색을 해보면 팬들의 추측이 빚은 오해인 것 같다. 그리고 엑스재팬의 전성기를 함께한 두 기타리스트 히데와 파타도 있다.

정예 멤버를 갖추고 수많은 공연을 치르며 실력을 쌓아가던 그들은 1988년 4월14일, 인디레디블에서 <배니싱 비전>을 발표하고 인디록 신에서 가장 주목받는 밴드로 떠오른다. 이 음반의 재킷 그림은 그야말로 문화충격이었다. 폭력성과 선정성 양쪽 모두에서 극단적이다. 2018년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희대의 음반 재킷이라 하겠다. 패션과 헤어스타일 역시 파격적이었다.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가부키 배우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머리는 공작새가 울고 갈 정도로 추켜올린 그들의 모습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지녔다. 실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들의 수레는 꽉 차 있었다.

이듬해, 엑스재팬은 소니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메이저 데뷔 음반인 <블루 블러드>를 발표한다. 많은 팬들이 엑스재팬의 최고 음반이라고 꼽기도 하고, ‘엔드리스 레인’, ‘위크엔드’ 등의 히트곡이 실려 있다. 이때부터 엑스재팬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일본열도를 휩쓸어버린 엑스재팬의 소문은 ‘왜색문화’라는 이유로 영화, 방송, 음악 등 일체의 일본 문화를 봉쇄했던 우리나라까지 흘러들어온다. 이른바 ‘해적판’으로 불리던 불법복제 레코드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액스재팬의 음악 성향은 멜로딕 스피드메탈 장르에 가깝다. 비하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중2 남자애들이 열광할 사운드라는 말씀. 그러나 그들에게는 극도의 여성향 록발라드 ‘엔드리스 레인’이 있었다.

‘암 워킹 인 더 레인~’ 더없이 느끼하게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당연히 방송 불가였지만 입소문을 타고, 불법복제 레코드와 녹음테이프를 통해 반도의 소년소녀들을 사로잡았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어서, 과격한 스래시 메탈을 듣다가 문득 이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짓곤 했다. 요즘도 가끔 노래방이나 가라오케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아재들을 목격한다. 몹시 기분이 유쾌했던 언제 한번은 가라오케 옆방에서 이 노래가 들리길래 ‘구레나이’로 응수해서 같은 아재임을 확인시켜 준 적도 있다. 결국 옆방에서 열창하던 펀드매니저 형님께서 술을 들고 우리 방에 찾아와서 훈훈하게 잔을 나누었던 기억도 난다.

그들의 전성기는 뜨겁고 짧았다. 데뷔 음반이 나온 지 5년도 안 되어 제각기 솔로 활동을 펼치며 밴드 활동은 흐지부지되었고 1997년에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그룹의 해체도 슬픈 일이었지만, 멤버들의 죽음은 팬들을 감당 못할 충격에 빠뜨렸다. 그룹 해체 후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인기도 유지해왔던 기타리스트 히데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판단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황당한 죽음이었다. 히데의 팬들이 잇따라 자살을 시도하는, 소위 베르테르 현상도 나타났다. 실력으로는 멤버들 중 최고였으며 한창때는 범접하기 힘든 미모를 자랑하던 다이지의 일생은 엑스재팬을 떠난 뒤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으로 치달았다. 극도로 가난해져서 노숙자 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간경화와 뇌경색 등 지병에도 시달렸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살던 그는 결국 외국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고 삶을 마감했다.

학창 시절, 엑스재팬은 멋진 음악을 듣는 기쁨만큼이나 골치 아픈 고민도 안겨주었다. 그 고민은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핀잔으로 시작되었다.

“들을 게 없어서 쪽바리 새끼들 음악을 듣냐?”

엑스재팬의 남은 이야기와 일본에 대한 단상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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