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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0 17:44 수정 : 2019.05.20 14:44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여름이었다. 퀸과 <보헤미안 랩소디>의 광풍이 불기 전, 아니 미풍도 불기 전에 이 칼럼에서 무려 4회에 걸쳐 예습을 한 바 있다. 퀸이라는 그룹과 프레디 머큐리라는 희대의 로커에 대해 공부하고 찬양했다. 이제 또 그런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이번 예습의 주인공은 엘턴 존이다.

다음달인 6월에 그의 전기 영화 <로켓맨>이 개봉한다. 제목만 보고 북한 김정은의 전기 영화인가 오해하지 마시길. 너무 잠잠하다고? <보헤미안 랩소디>도 개봉하기 전에는 조용했다. 올여름에는 엘턴 존 음악이 전세계를 뒤흔들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엘턴 존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영국 출신. 수많은 히트곡을 거느린 전설적인 팝가수. 아 맞다! 영화 <라이언 킹> 음악으로 유명하잖아! ‘캔 유 필 더 러브 투나잇’ 어쩌고. 이 정도만 알고 있다면 이 칼럼을 꼭 읽어주시길. 미리 공부하고 제대로 즐겨봅시다.

아직 활동하는 팝가수 중에서는 최고령 축에 속하는 엘턴 존은 1947년 3월25일 영국 런던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겨우 세살에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고 하니 천재 맞다. 그는 11살의 나이에 영국 왕립음악원 주니어 코스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팝 음악 양쪽 영역에서 탁월했다고 전해진다.

프레디 머큐리와 엘턴 존은 공통점이 무척 많다. 둘 다 영국 아티스트이고 양성애자 특히 게이적 성향이 강한 성적 지향도 같고 피아노를 기반으로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같다. 화려한 패션 센스를 지녔다는 점도 비슷하고. 프레디 머큐리도 그랬던 것처럼 엘턴 존 역시 아버지와 진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엘턴 존은 뮤지션이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은행원이 되라고 종용했단다. 세상에, 엘턴 존 같은 은행원이 있다면 어떨까? 은행에 하루 종일 콧노래가 울려 퍼졌을 테고 결국 해고당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턴 존은 15살의 나이에 첫 그룹을 결성하고 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부터 자작곡까지 다양하게 선보였는데 이때 상당한 기본기가 길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아르바이트 뛰듯 무대에 선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전문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결국 졸업장 그 자체가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립음악원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자퇴라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술집 무대에서 공연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래들을 만드는 날이 이어졌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저버리고 오직 음악만을 위해 스스로 배수진을 친 한 청년의 숱한 밤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지독한 불안과 후회, 절망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등 따시고 배부른 선택만을 하며 살았던 나로서는 짐작도 안 되고 까마득할 뿐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3살에 데뷔 음반을 발매하지만 흥행은 참패였다. 그는 굴하지 않고 더 많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1970년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2집 음반이 나오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음반에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피아노 발라드 ‘유어 송’이 실려 있다. 미국과 영국 차트 모두에서 10위권 안에 든 이 노래의 인기 덕분에 2집 음반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래미 어워드’ 주요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팝 음악 비즈니스의 큰손들 눈에도 들게 된다.

나이로 보면 겨우 20대 중반이었지만 워낙 일찍 가수의 길에 들어섰기에 노래는 차고 넘쳤다. 길고 긴 무명 시절 동안 절치부심하며 써놓은 노래들을 추리고 또 새로 작곡한 곡들을 모아 바로 몇달 뒤 세번째 음반을 발표한다. 수많은 술집 무대에서 공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과 미국을 누비며 순회공연도 시작했다. 천재가 부지런하면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엘턴 존이 딱 그랬던 셈이다. 그리고 몇년 동안 믿어지지 않는 전성기가 펼쳐진다.

유럽과 미국, 아시아까지 아우르는 세계적인 히트곡만 열거해도 너무 많은데 그중에서 몇곡만 짚어본다. ‘로켓맨’ ‘크로커다일 록’ ‘대니얼’ 등 히트곡을 쏟아내고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 음악 100선을 꼽으면 항상 들어가는 노래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도 이 시절에 발표한 곡이다. 나중에 조지 마이클과 함께 부른 버전이 훨씬 멋있는 ‘돈트 렛 더 선 고 다운 온 미’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프리덤’, 세상 사랑스러운 노래 ‘돈트 고 브레이킹 마이 하트’ 등. 퀸 노래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엘턴 존의 노래는 싫어하기도 쉽지 않으니 다들 들어보시라.

여기까지가 겨우 20대 후반까지의 기록이다. 그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7장의 음반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려놓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성공한 솔로 가수임이 확실하다. 최전성기로 꼽히는 1975년 같은 경우는 전세계 음반 판매량의 2%가 엘턴 존의 몫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한 바로 그 순간, 충격적인 뉴스가 팝 팬들에게 날아들었다. 다음 화를 기대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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