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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8 17:33 수정 : 2019.11.09 02:32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웨스트라이프, <한겨레> 자료사진

‘시간이 우리를 데려다줄 거야.’ 대체 어느 영화에 나온 대사일까? 혹은 어느 책의 한 구절일까? 아니면 노래 가사인가? 무책임한 운명론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우리를 위로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칼럼의 주인공 웨스트라이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 말이 떠오른다. 시간이 너를 데려다줄 거야. 그런데 어디로?

지금은 방송국 피디로, 또 웹툰·웹소설 작가로 일하고 있지만 내 첫 직장은 외국계 음반회사였다. 직책은 레이블 매니저. 평소에는 팝아티스트들의 앨범을 국내에 들여오고 홍보하고, 팝스타가 내한하면 프로모션 활동을 지원하는 일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음악에 미쳐 살았던 나에게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당시 최고의 팝그룹 웨스트라이프가 우리나라를 찾았고, 나는 막내 스태프로 그들을 따라다녔다. 꼭 20년 전 겨울이었다.

고백하자면 난 웨스트라이프를 비롯한 보컬그룹을 다 싫어했다. 음악이란 자고로 에너지가 있어야 하며, 기타와 베이스, 드럼으로 고막을 두들기는 록음악이나 날 선 가사로 영혼을 들쑤시는 힙합이 진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발라드 중에서도 깊고 처절한 쪽을 좋아했지, 아름다운 화음 따위는 아주 질색이었다. 그런데 세상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웨스트라이프라니. 정말 팬심이라고는 1도 없이 프로모션을 다녔다. <유열의 음악앨범>에 출연할 때도, 쇼케이스 공연장에서도, 차 안에 함께 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도 그냥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호텔 방에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갔을 때 그 사건이 발생했다. 멤버 수가 많다 보니 꽤 많은 양의 패밀리 레스토랑 음식을 잔뜩 포장해서 전해주고 나오는데 그들이 물었다.

“헤이 리, 넌 우리 노래 중에서 뭘 제일 좋아해?”

프로모션 기간 중에 잡담을 나누면서도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말한 적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없었다는 건데…. 그렇다고 너희들의 노래는 진짜 별로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그래서 국민 팝송 ‘마이 러브’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괜히 찔려서인지 후렴구를 잠깐 부르기까지 했는데, 흥얼거리는 내 목소리 위에 멤버들이 한 명씩 화음을 입히는 것이 아닌가! 왓 더! 당황했지만 후렴구 정도는 외우고 있었기에 조금 더 부를 수 있었다. “소 아이 세이 어 리틀 프레이어 앤 호프 마이 드림스 윌 테이크 미 데어~♬” 결국 후렴구가 끝날 때쯤에는 세계 최고의 보컬그룹 웨스트라이프 완전체와 함께 노래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의 전율이란!

그때부터 웨스트라이프, 이른바 ‘웨라’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얼마 안 있어 광고회사로 직장을 옮겼지만, 웨라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사서 들었다. 방송국 피디가 된 다음에는 내심 기대했다. 웨라가 한국에 또 오면 내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호텔 방에서 함께 노래했던 음반회사 직원을 혹시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일랜드 출신의 웨스트라이프는 1998년에 결성해 멤버 교체와 해체, 그리고 재결합을 거쳐 20년 넘는 세월 동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춤을 앞세운 보이그룹들과 달리 오직 목소리로만 승부하는 보컬그룹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 장르적 변화가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고, 그들의 음악은 늘 밝고 착하고 아름답다. 찬송가적인 색채도 꽤나 짙다. 이래저래 도저히 내가 좋아할 만한 노래들이 아닌데 아직도 신곡이 나오면 꼭 찾아 듣는 걸 보면 추억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뮤직비디오가 새로 공개될 때마다 멤버들의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말 그대로 아티스트와 함께 늙어가는 팬이랄까.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엔 아직 주름이 하나도 없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보컬그룹. 늦가을의 쨍한 바람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청명한 화음을 원한다면 꼭 들어보시라. 참고로 이달 중 새 앨범이 나온다.

우연히 호텔 방에서 그들과 함께 불렀던 그 노래,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팝 10곡’에 포함시켜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마이 러브’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작은 기도를 올리지. 내 꿈이 나를 데려가주기를. 파란 하늘 아래 그곳에서 내 사랑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시간은 우리를 미래로 데려다주지만 음악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다준다. 그 시절, 그러니까 20년 전 음반회사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그때는 스마트폰조차 없었기에 웹툰, 웹소설, 팟캐스트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20년 전에 예상했던 모습인지? 만족하십니까? 그때가 좋았나요?

앞으로 20년 뒤의 내 모습도 상상할 수 없다. 주름이야 지금보다 훨씬 많겠지만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는 도통 모르겠다. 작곡가? 병아리 감별사? 택시 운전사? 여전히 작가? 그러나 그때도 가끔 웨스트라이프의 노래를 찾아 들을 것은 확실하다. 그들의 노래는 언제나 나를 데려가줄 테지. 파란 하늘 아래 사랑하는 이가 웃고 있는 그곳으로. 시간의 힘만큼 대단한 노래의 힘이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피디 · 정치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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