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검을 갖고 싶었다. 나무로 만든 칼이 아닌, 진짜 무사들이 사용했던 칼. 전통무술에 빠진 대학생은 보수가 좋은 쌀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됐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새벽에 신문도 돌렸다. 놀이공원에서 풍물을 쳤다. 그렇게 조금씩 모은 돈이 60만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선 무사들이 왜구와 싸울 때 사용했던 칼을 복원한 환도를 구입했다. 106㎝짜리 칼에 이름을 새겼다. 청도(靑刀).
모든 무예의 시작은 맨손을 제대로 쓰는 것이다. 조선 병사들의 무예를 현대에 복원해 공연하는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이 수원 화성의 성곽 안 뜰에서 권법을 보여주고 있다.
권법을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권법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시퍼런 칼날에 눈이 부셨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칼잡이가 되기 위해 수없이 허공에 칼을 그었다. 땅심이 발바닥을 통해 올라와 강한 허리의 뒤틀림으로 이어지며, 그의 칼끝은 매섭기로 유명하다. 그 칼은 왜구가 쓰던 일본도에 비해 길이가 짧고 가벼웠지만 날렵한 공격과 수비가 가능했다.
비록 시간이 흘러 칼은 박물관에 진열된 시대이지만, 그는 조선의 무사가 되고 싶었다. 그것도 장수가 아닌, 이름없는 병사. 임진왜란 등 수많은 전쟁을 통해 가장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어야 했던 이는 실제 전장에서 무기를 쥐고 생사를 넘나들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역사에 이름이 남을 수 없다. 그가 칼 손잡이를 들어 올려 턱 앞으로 당기고 칼날을 세운다. 마치 호랑이가 수풀 속에서 먹이를 노리며 주변을 살피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맹호은림(猛虎隱林)의 자세. 당시 왜구들은 그 자세를 처음 보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검법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검법을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검범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정조 명으로 만든 실전 군사훈련서
이번엔 말이다.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은 수천년 동안 동서양 최고의 전사였다. 마상무예를 복원하고 싶었다. 그는 1년을 거의 날마다 말을 탔다. 심지어 태풍이 몰려오는 날에도 말을 타려고 하자, 관리인은 사고가 나면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무기를 들고 타니 보통 말은 놀라기 마련이다. 말을 탄 채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야 한다. 그러니 일반적인 승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느 날 무사와 말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최형국(42·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씨는 항상 1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교에서 그보다 키가 작은 학생은 없었다. ‘꼬마’였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싸움을 하면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장을 봤다. 눈초리가 매섭다. 대학에 들어가 탈춤을 배웠다. 한민족 전통문화에 눈이 갔다. 탈춤을 추다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수업에 들어가고, 짚신을 신고 다녔다. 택견을 익혔다. 활쏘기에도 빠졌다. 그리고 ‘경당’에 인연이 닿았다. 경당은 시국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조선시대 무예 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칼과 창 대신 빗자루로 독방에서 무술을 익힌 임동규 선생이 만든 도장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시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사 백동수가 주도해 만든 군사 실전 훈련서이다. 칼로 하는 무예 10가지, 창이나 봉으로 하는 무예 7가지, 맨손권법에 말을 타고 하는 무예 6가지 등 모두 24가지 무예를 담은 무예도보통지는 당시 최고 정예군인 ‘장용영’의 무사들을 키운 기반이 된다. 어렵게 산 진검을 등에 메고 다니던 그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무술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무를 천시했다는 건 식민사관 왜곡”
마침 그가 살던 수원에는 수원 화성이 있다. 그가 무예 24기를 수련한 데가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정조의 행차로도 유명한 성곽이다. 그는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단원들과 함께 무예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성이라는 성곽에 무예 24기라는 전통 콘텐츠가 결합해 관광 자원이 됐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식전 행사에 직접 연출한 무예 24기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학원 석사 논문으로는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이라는 논문을 썼다. 그가 연출하는 화성의 무예 시범은 2003년 주말 상설로, 2004년부터는 평일 상설로 확대됐다. 이제는 수원시 소속의 무예시범단 상임연출을 맡고 있다. 단원 1인당 갑옷과 전통 무기 등을 구비하는 데 거의 1천만원이 든다. 수원 관광의 필수코스다.
조선 병사들의 무예를 시연하는 무예시범단
조선 병사들의 무예를 시연하는 무예시범단
조선 병사들의 무술을 시연하는 무예시범단
전공을 경영학에서 역사학으로 바꿔 2011년 박사 논문 ‘조선 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를 썼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마상무예를 연구했다. 문무를 겸비한 셈이다. 역사학에서 무예사로 박사학위를 받기는 그가 처음이다.
그는 조선에 대해 무신을 홀대한 유약한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시선이라고 강조한다. “무관은 문관과 함께 조선시대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습니다. 양반은 무반과 문반으로 구성됩니다. 일제가 조선의 정신적 흐름과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는 조선을 미개하고, 무를 천시하고, 당쟁만을 일삼는 민족으로 낙인찍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역사가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뤄졌다고 꾸미기 위해 만든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전통무예, 국가 이미지 마케팅으로”
그는 조선의 무사들은 ‘신보수검’을 강조했다고 한다. 신(身)는 몸으로, 맨손 무예의 기반을 이룬다. 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육체의 한계를 깨닫는다. 다음은 보(步). 몸을 안정적으로 이동시키는 보법을 익히고, 기본 발차기를 익힌다. 그다음은 수(手). 손을 쓰는 법이다. 단순한 권법을 포함해 각종 무기를 다루기 위해선 손을 잘 써야 한다. 그다음이 검(劒). 칼뿐 아니라 상황에 맞는 다양한 무기를 다뤄야 한다.
복원한 조선 군복을 착용하고 권법 시범 보이는 최형국씨
최씨는 조선시대 병사들의 일상을 연구했다. 군율이 엄격했다. 전쟁 등 위급상황에서 깃발을 뺏기면 전원 참수를 했고, 노략질을 하거나 암호를 잊어도 참수했다. 갑옷은 스스로 사야 했다. 갑옷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곤장 세례를 받기에, 한때 값싼 종이를 겹쳐 만든 지갑(紙甲)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판문점을 말 타고 넘어가 평양에서 무술 공연을 하고 싶다”는 그는 “중국의 쿵후나 소림사,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이제 우리도 전통무예를 국가 이미지 마케팅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하게 말아 쥔 주먹을 천천히 그리고 힘있게 내지른다. 주먹 뒤의 안광이 차라리 푸르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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