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인데 칼이 아니다. 뭐라도 베어야 칼이다. 베기 위해선 쇠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휘두르는 칼은 쇠칼이 아니다. 목검이다. 나무로 만든 칼이니 그 칼에는 살기가 없다. 그러나 그 칼을 들고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는 완전 다르다. 그 노래에는 혁명이 있고 개벽이 있고, 선동이 있다. 그래서 그 목검을 들고 칼춤을 추던 사나이는 형장에서 사라졌다. 그가 부르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호시호(時呼時呼) 이내시호(以乃時呼)/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만세일지 장부로서/오만년지 시호로다/용천검 드는 칼을/아니 쓰고 무엇하리…” 지금말로 해석하면 이렇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바로 이때이다. 수만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이때, 대장부로 태어나 용천검을 쓰지 않을 수 없도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추던 작대기 칼춤이 수운 최제우의 칼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장효선씨는 그후 용담검무로 복원했다. 장씨가 목검을 쥐고 용담검무를 시범보이고 있다.
지금부터 154년 전 동학을 창시하고 역모와 혹세무민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한 수운 최제우(1824~1864)의 이야기이다. 당시 그를 심문한 관리는 수운에게 칼춤을 더 이상 추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수운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며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운으로부터 칼춤을 배웠던 동학교도들은 이후 뿔뿔이 흩어져 숨어서 몰래 칼춤을 추었다. 기록도 거의 사라졌다.
망자와 유족 달래는 소리하고 칼춤
그렇게 사라질 듯 하던 수운의 칼춤이 되살아났다. 용담검무라는 이름도 붙혀졌다. 용담은 수운이 동학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던 경북 구미산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용담검무를 재현한 이는 장효선(61)씨다. 장씨는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 목마를 타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씨의 고조 할아버지 장남진(1817~1883)은 남원에서 목수 일을 했다. 수운이 남원땅에 도피해 와서 은거할 때 고조부는 수운과 동학교도가 쓰는 목검을 깎아주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수운으로부터 칼춤을 배웠다. 동학교도로 입교도 했다. 그리고 칼춤은 그의 아들 장수만(1852~1931)에게 전수됐고, 또 그의 아들 장영철(1923~1980)에게 이어졌다. 장영철은 소리꾼으로 마을에 초상이 나면 구슬픈 소리로 망자와 유족을 달래줬고, 마지막을 멋들어진 칼춤으로 장식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칼춤을 배운 장씨는 자신이 추는 칼춤이 민족의 설움을 오롯이 담고 있는 동학의 칼춤인 줄 몰랐다고 한다. 태권도 5단의 실력을 기반으로 20대부터 무예시범단으로 활약한 장씨의 특기는 칼춤이다. 그의 칼춤은 다른 칼춤과는 전혀 다른 리듬과 동작을 갖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칼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막대기를 들고 익혔어요. 저도 모르게 칼의 리듬이 제 몸에 입력됐어요. 그리고 그 칼춤이 수운의 칼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어요.”
장효선씨가 부채를 들고 하는 옛 선비들의 수련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부채는 호흡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부채로 심신을 단련하는 시범을 보이는 장효선씨
동학 주문을 검무 동작으로 표현
그는 칼을 들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동작이 나왔다. 그가 추는 칼춤이 수운의 칼춤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본 이는 한양원(1924~2016)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이다. 생전의 한 회장은 어릴 때 선국사 스님으로부터 남원의 교룡산성에서 동학교도들이 칼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장씨의 칼춤을 보고 수운의 칼춤과 비슷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천도교에 입교한 장씨는 그 후 25년 동안 용담검무의 계승과 복원에 힘을 쏟았다. 그는 계승과 복원을 반반씩 혼합해 모두 105개의 연속동작으로 용담검무를 완성했다.
기본 자세는 지기로 시작한다. 동학의 21자 주문이 17개 동작으로 표현된다. 새벽 기운이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힘차게 용이 비상하듯, 목검을 회오리치며 올렸다가 단전으로 깊고 무겁게 끌어당긴다. 시호의 부문에선 목검을 들어 올렸다가 깊게 찔러 내린다. 충만한 희열이다. 용천검을 드는 동작은 해와 달의 기운을 한껏 품는다. 개벽을 위한 용기와 결단을 갖고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듯 좌우로 돌며 검을 거침없이 휘두른다. 마무리는 온 세상이 꽃향기로 가득찬 봄이다. 수운이 펴려고 했던 무극대도의 진리가 세상 사람을 일깨웠다. 절정에 달한 몸의 기운으로 양팔을 펴 3바퀴를 돌아 회오리치며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 왔음을 알린다.
용담검무를 시범보이는 장효선씨
수운은 비록 목검으로 칼춤을 추었으나 칼의 노래(검결)는 칼을 통한 변혁과 구체제와의 일전을 준비한 셈이다. 동학은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검결에 동학의 이념과 정신을 새겨 넣어 동학 교도들이 비밀결사하고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실제 갑오농민전쟁 때 이 검결은 군가로 불리기도 했다. 수운이 칼춤을 춘 기록은 최초의 동학관련 역사서인 <도원기사>에 “…또 검결을 지었고(又作劍訣)…”라는 표현이 있고, 천도교 창건사에는 “수운 선생이 관의 지목을 피해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은적암에 머물러 있을 때 도력이 나날이 충만해서 그 기운을 받아 달이 밝은 밤이면 산 정상에 올라 검가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도포를 입고 용담검무 시범 보이는 장효선씨 장효선씨 제공
제사 의식과 실제 전투용 양면
2015년 <용담검무의 춤사위와 검결의 문화적 가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인 장씨는 “수운 선생의 검무는 제사를 지내는 의식용과 실제 전투용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며 “동학교도에게 미래 유사시 혁명에 필요한 무사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했다”고 말한다. 수운의 칼춤 복장은 유학자의 복식이다. 양반가 신분이었던 수운은 미색의 저고리 바지에 옥색 도포를 입고 칼춤을 추었다. 장씨는 수운이 목검을 사용한 이유로 “목은 동을 의미하고 진검인 쇠는 금으로 서를 의미해 수운은 목검을 사용해 서양을 물리치고, 인명 살상이 아닌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상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무예인 용담검무가 예술로 승화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선 호흡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코로 충분히 들이 마시고 입으로 내쉬는 자연호흡은 몸과 검이 좌우로 회전하거나 연속동작을 할 때 사용한다. 강한 힘을 내는 동작에선 양의 호흡을 한다. 이 호흡은 코로 충분히 들이 마신뒤 3분의1을 입으로 내쉼과 동시에 단전을 등 쪽으로 끌어 당기며 호흡을 멈춘다. 강한 기운이 단전에 모인다고 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동영상/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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