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10 17:44
수정 : 2018.12.10 22:35
일자리가 늘지 않아 실망한 청년에게, 촛불집회에서 제기한 사회변화의 요구를 지금 어떻게 실현해가고 있느냐 묻는 직장인에게, 청와대는 출범 초기의 긴장과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지 예리한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지난해 8월17일의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여러모로 관심을 끌었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10개월 만에(대통령 당선일부터 따지면 1년이 지나서야) 첫 기자회견을 연 데 비해, 문 대통령은 석달 남짓 만에 기자회견을 한 게 우선 비교 대상이 됐다. 박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에선 저 유명한 “통일은 대박”이란 준비된, 그러나 진정성 없는 발언이 나왔다. 업무 뒤 무얼 하느냐는 질문엔 “보고서를 많이 읽고 장관이나 수석과 수시로 통화한다”고 답했다. 미리 조율된 질문과 대답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진 뒤에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장관이나 수석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에 비하면 문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사전 각본 없이 자유롭게 질의응답이 오간다는 평을 들었다. 올해 1월 문 대통령의 새해 기자회견이 끝난 뒤 애나 파이필드 <워싱턴 포스트> 도쿄지국장은 트위터에 “75분간의 기자회견은 놀랍다. 전임 정권이나 백악관과 달리, 모든 이에게 질문 기회가 열려 있고 사전에 질문을 조율하지 않는다”는 글을 올렸다. 취임 후 1년 넘게 문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엔 그의 품성과 소통 의지에 대한 국민 평가가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기자회견은 모든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수석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기자회견을 두고 “솔직히 대통령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좋은 기회라기보다, 의무감으로 받아들였다. 기자들의 질문은 종종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회견을 끌고 갔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언론에 열려 있다는 평을 들은 ‘오바마 백악관’이 이럴 정도니, 트럼프 대통령이 신문·방송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박근혜 대통령이 1년에 한번도 채 기자들과 만나지 않았던 걸 탓할 수만은 없다. 다만,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대통령을 민심과 괴리되지 않게 하는 윤활유 구실을 하는 건 분명하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국외순방 도중 대통령전용기 안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게 논란이 됐다. 순방중이니까 외교 사안 질문만 받겠다고 했는데, 보수 언론들은 ‘거북하고 불편한 질문을 봉쇄하는 일방통행’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라고 비난했다. 국민과의 소통이 꼭 기자회견일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언론의 위상과 영향력은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민의 32%만이 언론의 공정함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역대 최저 수치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통령이 꼭 신문·방송과의 기자회견에 전전긍긍할 이유가 별로 없다. 소수의 기자들만 따라가는 대통령의 기내 회견에서 ‘왜 질문 범위를 제한하느냐’고 따지는 건, 많은 국민들이 보기엔 그리 핵심적인 게 아니다.
그래도 국민이 궁금한 점에 관해 대통령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건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기자회견은 1960년대 미국에서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 같은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이 출현하면서 시작됐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흔히 ‘노변정담’이라 불리는 라디오 연설로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섰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은 이 라디오 연설을 부활해 국민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자회견이든 라디오 연설이든 또는 김대중 대통령 이후 정형화된 ‘국민과의 대화’든, 중요한 건 국민이 핵심 현안을 직접 묻고 대통령의 답변을 듣는 일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나 대변인을 통해서, 또는 시각적인 디지털 자료로 전하는 대통령의 ‘말씀’은 메마른 꽃과 같아 아무리 다듬고 치장해도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올해 5월 ‘취임 1년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4월에 극적으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6월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가 살얼음판을 걷던 시기라 기자회견이 없는 걸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지지율은 50% 선을 넘나들고, 앞으로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될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촛불 광장에 함께 섰던 세력들은 분화하고, 촛불을 거스르는 반동의 움직임은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일자리가 늘지 않아 실망한 청년에게, 촛불집회에서 제기된 사회변화의 요구를 지금 어떻게 실현해가고 있느냐 묻는 직장인에게, 청와대는 출범 초기의 긴장과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지 예리한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지금, 대통령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 이유다.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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