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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25 15:08 수정 : 2018.06.25 17:36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조합원 및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 등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산입범위를 조정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노동기본권을 침해하고 양극화를 심화한다며 헌법소원심판 청구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HERI의 눈]
주요 정책 잇단 뒷걸음질…‘앵그리 진보’ 나올 판
패러다임 전환에 걸맞는 전략과 실행력 못갖춰
담론 싸움 열세에 비전 펼치는 ‘전도사’도 없어
루즈벨트 같은 의지와 지혜로 국민 설득 나서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조합원 및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 등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산입범위를 조정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노동기본권을 침해하고 양극화를 심화한다며 헌법소원심판 청구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소득주도성장’이 흔들린다. 자칫 머지않아 링 안으로 수건이 날아올 지도 모를 만큼 위태롭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은 지난 몇 달간 보수 언론과 학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16.4% 오른 올 최저임금의 부작용을 집중 부각해 소득주도성장, 나아가 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거듭된 공세에 자신을 잃었는지, 정부와 여당은 최저임금의 산입범위를 바꾸고,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사실상 6개월 유예하는 등 뒷걸음질 치고 있다. ‘임기 3년내 1만원’을 목표로 했던 최저임금의 연속적 인상도 올해는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정부 출범 1년 만에 경제정책 기조를 ‘리셋’할 상황에 몰린 것이다. 남북 관계에선 압도적 지지를 받는 문재인 정부이지만, 경제에서는 지지자가 ‘앵그리 진보’로 돌아서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보수 언론의 비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새로 출범한 정부가 국민의 뜻을 좇아 분배와 노동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재벌체제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이면 예외없이 공격의 날을 세웠다. 때마침 닥친 경기 침체나 위기는 좋은 빌미가 된다. “아마추어 같은 정책”이라거나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정작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따위의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처방도 늘 똑같다. “규제를 확 풀어라” “노동유연성이 필요하다” “성장하려면 기업의 기를 살려줘라”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니 개방이 살길이다” 등이다. 내놓고 말하진 않으나, 재벌 중심 경제, 성장과 효율, 낙수효과, 기업의 자유를 편드는 것이고, 억누르는 것은 재벌개혁, 분배와 균형, 분수효과, 노동의 권리 등이다.

이런 공격에 무너져 역대 정권의 변화 시도는 거듭 좌절돼왔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초청해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이 싸움이 일단락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재벌에게 ‘투자 좀 해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자리였고, 이심전심으로 개혁은 서랍속으로 들어갔음을 알려주는 행사였다. 외외로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왔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인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재벌도 좀 변해주길 바란다”고 각을 세웠다. 하지만 재계의 불만이 높아지자 취임 첫 해 7월에 슬그머니 “경제민주화는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하더니, 8월에는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만사 제쳐놓고 (지원에)최선을 다하겠다”며 투자를 당부했다.

이에 앞서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고자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카드사태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높아지고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언론과 재벌의 파상공세를 넘지 못했고,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벌 총수와의 첫 만남을 취임 석 달이 지난 2003년 6월 초 청와대 근처의 한 삼계탕 집에서 가졌는데, 이를 전환점으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바뀌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아이디어를 내고 재계가 힘을 다해 뒷받침한 ‘2만 달러 국민소득 달성’이란 의제가 두 달 뒤 8·15 경축사에 국정과제로 포함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개혁을 추진하던 청와대와 정부 인사들은 하나둘 가방을 쌌다. 이처럼 싸움의 끝은 개혁을 추진한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비록 오보라고는 하지만 최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그만둔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랑비에 옷젖는 법이다.

이렇게 몰린데는 청와대와 정부의 전략 부재 탓이 크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상징되는 현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은 단지 최저임금을 올리자는 게 아니다. 이는 동력을 잃어버린 경제의 ‘기어’를 바꾸어 넣는, 즉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큰 변화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7월 내놓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더불어 잘 사는 경제’라 표현했다. 이는 “경제의 중심을 국가와 기업에서 국민 개인과 가계로 바꾸고,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경제”를 말한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있게 경제를 이끌도록 하며, 혁신이 일어나는 중소기업, 모험기업으로 인재와 자원이 흐로도록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사실 ‘경제민주화’ ‘포용성장’ 사람중심 경제‘ 등 표현이 달랐지만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지는 10년이 넘는다.

정부와 청와대는 이런 큰 변화를 실행하는 종합적인 비전도 실행력도 부족했다. 정부가 ‘더불어 잘 사는 경제’를 위한 5대 국정전략에 이런 항목들을 넣어놓은 것을 보면, 소득주도성장이 혁신성장, 공정경제, 4차 산업혁명 기술발달 등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나 혁신성장 쪽에선 진척이 별로 없었다. 소득주도성장과 관련해서도 최저임금 인상을 빼곤 저소득층의 복지와 고용을 위한 재정활용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증세에 소극적이었다. 최저임금 인상도 우려했던 대로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을 대 을’의 싸움을 벌이는 양상으로 흘렀다.

또 다른 실책은 정부와 청와대가 ‘담론’ 싸움에서 지고 있는 점이다. 경제는 과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야기’인 측면이 강하다. 어떤 통계나 사실, 그에 대한 해석, 전망을 둘러싸고 ‘설득의 싸움’이 벌어진다. 언론은 이런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다. 승패에 따라 어떤 정책이 채택되기도 하고 없던 일이 되기도 한다. 경제의 방향타를 크게 틀어야 한다면 설득의 전면에 나서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에 쏟는 열정이 경제개혁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더 시급한 일에 집중한다면, 그를 대신할 유능한 참모가 있어야 한다. 외한위기를 극복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경제에 해박하기도 했지만 이헌재 씨를 위기 극복 ‘전도사’로도 잘 활용했다. 비서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홍장표 경제수석이 경제 패러다임 전환에서 보여주는 존재감은 약한 편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 관료들이 소득주도성장을 변호하기 위해 ‘내 일’처럼 나섰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만신창이가 된 미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세운 대통령이다. 당시만 해도 경제위기의 전형적인 처방은 ‘근검절약’이었다. 이런 잘못된 처방으로 경제는 더 나빠졌다. 루스벨트는 수요부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고, 대규모 재정사업을 일으키고 노동에게 힘을 실어주며 소득을 높여주는 정책을 썼다. 최저임금제, 농업보조금제, 사회보장제 같은 포용적 경제정책의 주춧돌이 이 때 놓였다. 물론 듀퐁 같은 대기업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80% 이상의 언론도 비난 대열에 동참했다. 루스벨트는 사회주의자, 파시스트, 독재자 소리를 들었다. 취임사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한 루스벨트는 이들에 결연히 맞섰다. 당시에는 뉴미디어였던 라디오를 잘 활용해 ‘노변담화’로 국민들에게 개혁의 비전과 당위성을 설명하며 난관을 하나하나 넘었다. 문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존경한다고 했다. 경제개혁에 관한한 루스벨트의 결기와 지혜가 필요한 때다.

팔씨름을 할 때 어느 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힘을 써도 소용없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이 점차 가까워 보인다. 더 늦기 전에 소득주도성장을 구해내야 한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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