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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반려동물

만사에 태연한 존재, 인간을 사로잡다

등록 2019-04-02 10:50수정 2019-04-03 09:30

[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7. 히시다 슌소, 세이 고야나구이, 가와나베 교사이, 모리 칸사이, 셴저우, 고양이
잠자는 고양이, 히시다 슌소(Hishida Shunso, 1874~1911)
잠자는 고양이, 히시다 슌소(Hishida Shunso, 1874~1911)
온종일 잠으로 소일하며(하루 13시간 정도를 내리 자는 것이 아니라 토막잠을 잔다) 하는 일이 거의 없이 느긋하고, 홀로 지내는데도 외로움을 전연 타지 않는 존재.

유능한 포식자로서 저만의 영역을 거느리며 제 삶의 운명을 스스로 좌우한다는 점에서, 자립적이며 자유로운 존재. 언뜻 길들여진 듯 보이지만 결코 완전히 길들여지지는 않는 존재. 유연하면서도 강인하여, 유(柔)와 강(强) 사이의 최고의 균형을 보여주는 존재.

히시다 슌소의 그림이 들어간 우표
히시다 슌소의 그림이 들어간 우표
고양이의 이러한 면모는 관찰자인 우리에게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개나 양, 소, 말 같은 다른 집 동물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별스런 면모였던 데다, 무엇보다도 무리 동물의 일원이 되어, 무리 속에서 길들여진 채, 아등바등 살아가며, 그러면서도 늘 가슴 어딘가에서 허전함을 지워버리지는 못하는 우리 자신과도 극명히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와는 달리 우리가 무리 동물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물 탄 맥주’ 같은 말이다. 우리의 친사회적(prosocial) 성격을 지워버리면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일체가 사라져버리는 것과도 같아서, 남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이상적인) 우리 자신의 이미지는 곧 우리의 행동의 원인이 되곤 한다.

그 이미지는 많은 경우 도덕 감정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감정 역시 사회적 효용 탓에 우리 안에 주형(鑄型, mold)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특정한 도덕 감정을 내면화한 것 역시, 그렇게 하는 편이 그렇지 않는 편보다 우리 자신의 생존에 유익하다는 판단 때문인 경우가 태반이지 않던가.

따라서 순도 100%의 이타성이나 도덕심이란 인간사회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순도 100%의 고립이나 독립이란 것도 인간의 마을에서는 성립 불가능할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좋아요’를 클릭해주는 ‘좋아요 공동체’ 속을, 이불 속을 파고드는 어린 아이처럼 파고들며 안온감과 자기 효능감을 찾는 이들이어서, 이 공동체 만들기와 유지 관리에 각별히 애를 쓰곤(또는 애가 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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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양이

그러나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인 걸까? 운명을 질문하는 자, 운명에 도전하는 자, 운명에 도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자가 인간이 아닐까? 우리의 시선을 고양이에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질문, 도전, 상상의 용틀임이다. 인간과는 결 다른, 인간의 한 이상을 현실화한 고양이의 존재는 그리하여 숱한 화가, 작가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들의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고양이를 여신(바스트Bast 또는 바스텟Bastet)으로 숭배했던 고대 이집트인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근대 일본인 중에는 고양이 오타쿠가 많았던 듯하다. 특히 만사에 태연한 듯한 고양이의 자태에 근대의 어떤 일본 화가들은 열광했다.(아니라면 당시 대중의 열광에 이들은 작품으로 응수하며 돈벌이에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우표에 실린 검은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한 히시다 슌소(Hishida Shunso, 1874~1911)일 것이다. 그의 <잠자는 고양이>(1883)에서 우리는 눈길을 좀처럼 떼기 힘든데, 메이지의 격동기를 살았던 이들의 영혼 깊은 곳의 욕구,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자기의 본질마저 잃지는 않으려는 간절함이 작품에 일렁이고 있다면, 지나친 해석이 될까?

안락의자 위에서 잠자는 고양이, 세이 고야나기(Sei Koyanagi, 1896~1948)
안락의자 위에서 잠자는 고양이, 세이 고야나기(Sei Koyanagi, 1896~1948)
이 ‘간절함’이 생략된, 잠자는 고양이의 모습을 우리는 슌소의 약 20년 후배가 되는 세이 고야나기(Sei Koyanagi, 1896~1948)의 <안락의자 위에서 잠자는 고양이>(1920년대)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 속의 잠은 ‘사치와 평온과 쾌락’(샤를 보들레르의 시구, 앙리 마티스와 장 자끄 쌍뻬가 각기 작품 제목으로 사용)의 잠이다. 나쓰메 소세키(Natsume Sōseki, 1867~1916)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년 연재) 이후, 더 중요하게는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에 나온 작품으로, 어쩐지 제국주의의 단물 또는 ‘탈아입구(脱亜入欧)의 감성’ 같은 것이 배어 있는 듯싶어 영 정이 가지 않는데, 유독 나만 그런 걸까?

잠자는 고양이, 가와나베 교사이(Kawanabe Ky&#333;sai, 1831~1889)
잠자는 고양이, 가와나베 교사이(Kawanabe Kyōsai, 1831~1889)
세이 고야나기의 이 작품에서 ‘사치와 쾌락’을 콕 집어 빼내면, 그의 조부 세대에 속하는 가와나베 교사이(Kawanabe Kyōsai, 1831~1889)의 멋진 작품 <잠자는 고양이>(1885~1889)가 된다. 잔잔한 호수 표면 같은 느낌을 붙들어 놓은 이 작품에는 소가 느꼈을 역사의 강압도, 고야나기에서 느껴지는 무뇌아 같음도 찾기 어렵다.

나아가 ‘신경 끄기’, ‘반응하지 않기’, ‘열심히 살지 않기’, ‘소소한 것에서 행복 찾기’ 같은 우리 시대의 처세술에서 느껴지는 어떤 소아병적 또는 자폐적 집착도 찾을 수 없다. 평온하면 닫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열리게 되는데, 이러한 열림이 이 고양이의 미소에 담뿍 맺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심취한 고양이와 나비(&#37204;猫胡蝶&#22259;), 모리 칸사이(Mori Kansai, 1814~1894)
심취한 고양이와 나비(酔猫胡蝶図), 모리 칸사이(Mori Kansai, 1814~1894)
한편, 교사이의 이 작품에서 명상적 성격만을 분리 추출해 다른 그림으로 연금(鍊金)해보면 모리 칸사이(Mori Kansai, 1814~1894)의 <심취한 고양이와 나비(酔猫胡蝶図)>가 된다. 이 작품은 분명 인류의 고양이 탐구의 한 절정(summit, 최고봉)이다.

그러나 무심한 듯한 고양이에게서 평온과 명상의 성격을 간취(看取)해 응결했던 이 같은 작품들은 19세기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전혀 아니다. 교사이, 칸사이, 슌소, 이들 모두는 실은 15세기 중국 문인화가 셴저우(Shen Zhou, 沈周, 1427~1509)의 후예들인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

셴저우(Shen Zhou, 沈周, 1427~1509)의 작품
셴저우(Shen Zhou, 沈周, 1427~1509)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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