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수염 동물기] 낯선 ‘캐시’와의 하룻밤
뉴질랜드 오지에서 먼저 마중 나오더니
와인 한 잔 하고 온기를 나누다
뉴질랜드 오지에서 먼저 마중 나오더니
와인 한 잔 하고 온기를 나누다
뉴질랜드 오지에 사는 야생동물을 만나기 위해 인적 드문 야생을 돌아다닐 때였다. 식량이 떨어져서 급하게 인간 마을에 들렀다. 어두운 저녁 적당한 야영지를 찾지 못해 모텔에 묵기로 했다. 그러나 관광객도 없는 오지 마을에 불 켜진 업소를 찾기 어려워 아무 모텔에 전화를 걸어 숙박이 가능한지 물었다. 주인장은 어디 나와 있다며 20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조용히 기다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큰 나무 아래 하얀 고양이.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 부비적거렸다. 나도 간만에 느끼는 생명체의 온기가 반가워 같이 더듬거렸다. 처음 보는 내 앞에서 몸을 뒤집어 노는 모습이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고양이랑 놀고 있으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점점 추워지는데 30분이 지나도 주인장이 오지 않아 다시 전화했더니 조금만 더 기다리란다. 곧 주인장의 가족이 나타났다. 방을 열어주고 숙박시설을 설명하면서 고양이 소개도 같이 했다. 이름이 캐서린인데 줄여서 캐시라고 부른다고. 그런데 녀석이 우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내가 괜찮냐고 묻자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녀석 원래 이런다고. 아니, 손님이 고양이를 싫어할 수도 있는데 그는 내가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설명을 마친 그는 자기 집으로 향했다. 캐시도 그를 따라 나갔다. 아, 가는구나. 아쉬운 마음으로 문을 닫았다. 짐을 풀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열었더니 캐시가 들어가도 되냐는 듯 쳐다본다. 반가워! 쪼그려 앉아 눈을 깜박이자 조심조심 들어온다.
마치 이곳이 내 집이라는 듯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테이블 의자 아래 자리를 잡고 식빵을 굽는다. 내가 캐시의 집에 잠깐 머물다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녀석이 벌떡 일어나 나의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야옹거린다. 밥 달라는 거구나. 내가 가진 건 채식 음식뿐인데 어쩌지. 그러다 문득 여행 초반에 비상용으로 사두었던 참치캔이 떠올랐다. 배낭 맨구석에 박혀있던 캔을 꺼내자 캐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옹거리는 톤이 좀 더 빠르고 높아졌다. 빨리 달라는 거구나. 접시에 참치를 꺼내어 식탁에 올리자 캐시가 의자에 올라왔다. 끅끅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먹는 녀석. 배가 많이 고팠나? 나도 그 옆에서 동네 가게에서 산 와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 야생생활 내내 야생동물 눈치 보며 혼자 밥 먹다가 누군가와 편하게 같이 밥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식사를 마친 뒤 노트북을 열어 며칠 전 만났던 옐로우 펭귄을 기록하려는데 의자에서 식빵을 굽던 캐시가 내 무릎으로 건너왔다. 자꾸 나에게 몸을 비빈다. 만져달라는 건가? 하지만 할 일이 있던 나는 개의치 않고 일을 했다. 바다 일을 마친 펭귄이 해변으로 퇴근해 날개를 퍼덕이며 끼룩끼룩하는 영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녀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글을 쓰는 내내 캐시는 조용히 내 무릎 위에서 식빵을 구웠다. 초겨울이라 싸늘했지만, 녀석의 온기에 핫팩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녀석, 기침을 한다.
자세히 보니 콧물도 방울방울 달려있고.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온기가 필요했던 거구나. 서둘러 난방을 틀었다. 나는 춥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괜찮았지만, 녀석에게는 따뜻한 밤을 선물하고 싶었다. 방이 따뜻해지고 내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녀석은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잤다.
곤히 잠든 녀석을 두고 침실로 들어와 누웠다. 그러자 방문이 스르르 열린다. 올라가도 되냐는 듯 살짝 눈치를 보길래 눈으로 올라오라는 신호를 줬더니 녀석이 가볍게 침대로 올라온다. 그러더니 자기 두 앞발을 모아 내 앞발에 슬며시 대는 게 아닌가. 이건 뭐하자는 건지? 마사지해달라는 건가? 머리를 살살 만져주자 좋아하는 것 같다. 뭔가 느끼는 표정… 물을 마시고 돌아오자 침대 한복판에 떡하니 자릴 잡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같이 자자는 거구나. 연신 기침을 하는 녀석이 측은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주었다. 녀석은 쌔근쌔근 잠이 들었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에 서호주 오지에서 만난 들고양이가 떠올랐다. (관련기사 '외래종'이라는 이름의 사냥감이 된 호주의 고양이들) 외래종이라는 이유로 독극물이 뿌려진 들판에 살고 있던 녀석. 한국의 길고양이들도 떠올랐다. 재수 없다는 이유로 혐오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운명. 그리고 인간의 가족이 되어 죽을 걱정 없이 잘 지내는 집고양이 캐시. 같은 고양이인데 이렇게 처지가 다르다니. 모두가 똑같이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혐오 당하거나 죽임당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들은 지구별에 한 생명체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인간에 의해 처지가 달라진다는 것에 괴리감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머리맡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캐시가 내 머리에 잠들어 있었다. 어제와 달리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침은 멎은 것 같아 다행이다. 깨우지 않으려 천천히 일어나자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쭈뼛 섰다. 아침을 준비하는데 녀석이 나와서 또 야옹거린다. 아침 달라는 거구나. 일단 물부터 주고 마지막 남은 비건 참치캔을 따서 주었다. 콩으로 만들어진 가짜 참치캔인데 잘 먹어서 신기했다. 나도 시리얼과 아몬드 브리즈로 간단히 때운 뒤 짐을 챙겨 모텔 밖으로 나갔다.
캐시는 방 안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배낭을 메고 완전히 떠날 채비를 하자 문 앞에 앉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도 지그시 바라보며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덕분에 몸과 마음 모두 따뜻한 밤 보냈어. 캐시야 고마워!’
글·영상·사진 긴수염 지구별 인간생명체
나의 모텔방에 들어온 고양이 캐시. 즐거운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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