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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우리가 ‘쓰고 버렸던’ 말(馬)의 진면목

등록 2019-05-31 16:15수정 2019-06-03 09:06

[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11. 카스틸리오네, 말
십준도 중,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십준도 중,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말(馬)은 신박하다. 말은 상서롭다. 말은 이채(異彩) 있는 동물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이 동물의 심성이 대(竹)처럼 의젓하고, 난(蘭)처럼 조용한 까닭이다.

이를테면, 말에게는 범이나 스라소니, 치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의 반지빠름이 없다. 범고래처럼 포악하지도, 사슴처럼 모질지도(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숲을 초토로 만들어버린다) 않아서 정감이 가고, 제법 긴 꼬리가 있지만 개처럼 흔들어대며 알랑방귀도 뀌지 않아서 미운 구석을 찾기 어렵다.

말의 심장 박동 또는 심장 가락은 말의 성질머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 가락으로 보면 말은 대왕고래나 코끼리와 닮아서, 이것의 심장은 ‘렌티시모(Lentissimo, 매우 느리게)’로 뛴다.(대왕고래는 10bpm, 코끼리는 30bpm, 말은 35bpm. bpm은 1분당 박동수를 뜻한다) 도무지 휴식이라는 것을 모른 채 종일토록 발밭게 심장 운동을 지속하는 쥐나 벌새(쥐는 800bpm, 벌새는 1200bpm) 같은 부류와는 삶의 격조가 애초부터 다르다.

_______
말, 형태의 아름다움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이 동물에 붙들어 매는 것은 심성이나 성격 이전에 그 건장한 신체일 것이다. 어떤 말은 몸무게가 무려 800kg을 넘어서는가 하면, 힘은 또 어찌나 장사인지, 자동차 엔진의 힘을 계산하는 단위는 아직까지도 마력(馬力)이다.

말은 형태와 색채에서도 단연 출중한 포유동물이다. 지구 생물의 형태미를 겨루는 미의 제전. 만일 이런 것이 있다면 포유동물들은 대개 본선에 오르지 못할 것이 빤하지만, 말은 예외에 속한다. 칠레의 시성(詩聖) 파블로 네루다는 포유동물의 형태미를 최대치로 구현한 듯한 이 동물에 대해 이렇게 노래할 정도였다.

“이들의 엉덩이는 공이었고 오렌지였다/이들의 털빛은 호박빛과 꿀빛이었고 불타오르고 있었다/이들의 목덜미는 오만한 암석에서/깎아 낸 탑이었으며/…말들의 강렬한 출현은 피였고/율동이었고 존재의 환호하는 성배였다.”(파블로 네루다, <말> 중에서)

유음입마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유음입마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그렇다면 중국 청대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의 말 편애를 이해 못할 것도 없지 싶다. 카스틸리오네는 동물화에 두루 능숙한 일급 화가였지만,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그린 동물은 개와 말이었다.

팔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팔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량시닝(양세녕, 郞世寧)이라는 중국식 이름도 있었던, 이 이탈리아 출신의 중국 황실 화가는 십준도(十俊圖), 팔준도(八俊圖), 백준도(百俊圖)를 많이 남겼는데, 이 그림들 속 소재가 바로 개와 말이었다. 10종류의 걸출한 개, 8마리의 뛰어난 말, 100마리의 준마, 이런 식이었던 게다.

아무 것이나 랜덤으로 골라서 봐도 카스틸리오네의 준마도들은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지만, 기중에서도 유독 ‘유음입마도(柳阴立馬圖, 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말)’라는 제목의 작품은 내 시선을 오도카니 멈춰 세운다.

팔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팔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인생의 무상함을 일러주는 듯한 바람의 한복판에 서서, 그러나 무상의 비애라고는 한 점도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고 엄전한 자태를 드러낸 이 흑마는 그러니까 내 기억 창고를 똑똑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창고에서 해방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야생마는 길들지 않는다’라는 작품에서 소개한 어느 불운한 야생 흑마다.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하며 집요한 카우보이 조를 따돌리고는 “유성처럼 유유히 협곡을 내려갔던” 야생마 무스탕이 바로 그 말이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의 소유자인 이 흑마는, 고혹적인 어린 암말을 미끼로 세운 어느 노회한 카우보이 늙은이의 시커먼 꾀에 그만 넘어가고 만다.

백준도(부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백준도(부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우리의 피를 뛰게 하는 것은, 포획된 뒤 녀석이 보인 행동이다. 녀석은 “공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칠 것 같은 속박 때문인지” 콧김을 내뿜으며 필사적으로 분투를 계속하다, 가증스러운 인간의 노예가 될 바에야 차라리 죽음이 윗길이라는 판단을 세우고는 자살을 선택한다.(어니스트 톰슨 시튼, 장석봉 옮김, ‘커럼포의 왕, 로보’ 참조)

그러니까 ‘유음입마도’의 흑마나 시튼의 흑마는 “나는 전에 한 억센 준마가 입에 물린 재갈을 씹으며 천둥처럼 내달리는 것을 보았다”고 오비디우스가 읊었던 바로 그 말이다. 멍에와 재갈을, 누군가의 노예 됨을 모르는 동물. 즉, 이들 흑마는 지구 생명사에서 출현한 장엄한 신품(神品)이지, 경주마로 몇 년 굴러다니다 종국엔 도축장에 끌려가 ‘개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추레한 동물이 아닌 것이다.

_______
말을 껍데기만 봐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네루다, 오비디우스, 카스틸리오네, 시튼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비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물신 사회에 구속된 우리들에게 말이란 돈이 되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도박으로 떼돈 벌게 해주고, 어린이 승마 체험으로 지갑 불려주고, 또 고기가 되어서 배를 불려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말이다. 삼성이 최순실의 딸에게 공여한 말의 값이 20억원이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기억해봄 직하다.

그러나 산 말 재갈 물려, 죽은 말 시체 팔아 돈 버는 사람들아, 말에 나타난 지구의 기적을, 조물주가 말에게만 선물한 것을 하나도 못 본 채, 이제껏 말의 껍데기만을 봐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 한다.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고상한 말의 영혼들이, 돈 말고는 볼 줄 아는 것이 없는 그대들의 기생충 같은 영혼을 끝내 기억하리라는 것도.(다음 편에 계속)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

백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백준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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