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산책자를 전일(全一)한 존재로 회복시킨다. 네 발로 이동했던 포유동물의 후손이자 이족 보행을 감행했던 이들의 후손, 그러나 현대의 각종 뉴 테크(tech)에 적응한 이, 이 삼자(三者) 간의 분열이 산책하는 이에게선 사라진다. 산책자는 포유동물의 몸인 제 몸을 길의 바다에 저어 가는데, 그때 그이는 500만 년간 실험되었던 지속적 이족 보행의 결과물을 신체에 재구축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생각 거리를 손바닥 위에 놓고 굴려가며 걷는다.
사색하는 발이자 걷는 뇌인 산책자는 그러니까 존재의 분열이 아니라 통일을 체험한다. 또는 산책자에게는 단 하나의 몸, 사색하는 몸만이 체험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산책이 우리에게 긴요한 건, 우리가 생각함으로써 해결해가는 정신의 존재(homo sapiens)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동해야 편안한 존재, 즉 발 달린 동물(animal)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는 그래서 숨 쉬고 마실 권리만큼이나 긴요한 권리이지만, 사실 그건 인권이기 이전에, 동물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누려 마땅한 기본적인 동물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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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과 함께 사라진 양의 신화
20세기는, 동물의 이 기본적인 권리가 일부 동물에게서 박탈된 세기였다. 수천 년 넘게 지속된 목축업(牧畜業)이 돌연 축산업(畜産業)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황당한 사건이었다. 목축업의 붕괴로 농장 동물들이 산책하는 풍경이 사라졌고, 그건 곧 이 임무를 수행한 목자(牧者)들이 사라졌음을 뜻했다.
목자가 사라지자, 목자와 양에 관한 신화도 삽시간 의미의 빛을 잃었다. 산업자본주의는 단지 노동자를 노동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지속된 오래된 이야기(신화와 설화)들로부터, 친교(親交)할 수 있는 자연으로부터 인간 모두를 소외시켰다.
나는 리처드 웨스톨(Richard Westall, 1765~1836)의 한 작품에서 새로운 소외를 예감한 최후의 목자를 발견한다. ‘여름 폭풍-폭풍 치는 들판에 개와 양과 함께 있는 어느 목자’(Summer Storm-A shepherd with his dog and sheep in a stormy landscape)라는 작품으로, 작품 속 목자는 두렵기만 한 새로운 시대의 얼굴을 본 듯, 불안한 눈길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여름 폭풍-폭풍 치는 들판에 개와 양과 함께 있는 어느 목자, 리처드 웨스톨
개는 시선을 주인에게 두며 이 불안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양을 보라. 양들 사이에서는 정적 기가 흐를 뿐이다. 양은, 인공지능(AI)과 지엠오(GMO·유전자 변형 유기체), 플라스틱과 기후위기에 관하여 신(神)이 아무런 말이 없듯, 아무런 말이 없다.
하늘을 닮은 양의 순박함, 그리고 양털과 양젖, 양의 살점이 준 안락함에 눈 뜬 인간에게 양은 순결함, 순수함, 훌륭함, 부(富)를 뜻하게 된다. 유사(有史) 이전의 어느 시점, 정확히는 1만3천 년 전부터 양을 길렀던, 지구의 거의 모든 인간의 마을과 도시에서 이 공통의 상징이 발견된다.
고대 이집트의 신인 크눔(Khnum)과 헤리샤프(Heryshaf)는 어린 양의 머리를 한 신이었고, 수메르인들은 양의 신인 더투르(Duttur, 다른 말로는 시르투르Sirtur)와 목자의 신인 두무지드(Dumuzid)를 섬겼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양은 의미심장한 상징이어서, 성자란 성자는 모두 목자로 비유되었고, 어린 양은 예수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양 신(Agnus Dei)’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오늘까지도 유럽 곳곳의 교회, 그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양에 관한 의미부여의 전통에서는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자에는 이 전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이를테면 아름다움(美), 선함(善), 의로움(義), 상서로움(祥), 기름(배양함, 養) 같은 중요한 개념어에 모두 양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아직 양과 관련한 의미의 전통을 근대라는 악마가 다 삼키기 전, 19세기 프랑스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양과 목자의 성스러움을 서둘러 화폭에 옮겼다. 1880년대, 나이 오십을 넘긴 피사로가 보기에 목자는 양과 같이 순수한 존재였고, 그런 존재여야 마땅했다.
집으로 돌아온 양들과 여성 목자, 카미유 피사로
예컨대, 1888년에 그린 ‘목자와 양’(Shepherd and sheep)에서 우리는 신성한 빛으로 가득 찬 화면을 만나게 된다. 한자어 상(祥, 상서로움)을 형상으로 빚어놓은 듯한 놀라운 화면이 아닐 수 없다. 이 빛은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작품과 유사한 환희의 송가이지만, 양처럼 소리가 없는 송가여서 도리어 온 누리에 가득 퍼질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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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성자, 하늘을 닮은 양
그런데 소리인 이 빛은, 지금 점으로 결정되어 있어 이채롭다. 그건 피사로가 조지 쇠라(George Seurat)와 폴 시냑(Paul Signac)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점묘법을 수용했기 때문인데, 사물의 기초 입자인 원자를 발견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자와 쿼크까지 발견했던 물리학자들의 모험을 닮은, 이 ‘점의 모험’은 과학과 예술과 종교의 경계를 당장 허물어버릴 듯 기세가 훤칠하다.
그것은 아무려나, ‘집으로 돌아온 양들과 여성 목자’(Shepherdess with returning sheep)](1886)라는 또 다른 작품에서 우리는 피사로가 발견한 ‘이상(理想)의 인간’과 조우한다. 어느 여성의 형상으로 구현된 그 이상은, 말하자면 소박한 삶이라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활동하는 모성이고, 포옹이며, 감응이고, 친교다.
양이라 하면, 어디에 맛 좋은 양꼬치 집이 있는지에만 관심(Sorge)을 한정시키고만 가엾은 오늘의 우리들, 양꼬치 귀신들이 잃어버리고 만 능력들 말이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 <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