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에서 고고한 척 살아가는 암산과는 다르게 숲은 지구 물순환계, 탄소순환계의 일꾼이어서, 노는 듯 바쁘게 살아간다. 게티이미지뱅크
안개에 싸인 높은 산봉우리를 향해 누군가가 말인지 나귀인지를 타고 오르고 있다. 산에는 듬성듬성 침엽수가 보이기도 하지만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산을 오르는 당자는 추정컨대 화가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이 경치는 화가의 눈에 드러난 그대로의 실경인 걸까?
중국 명대 화가 왕루(王履, 1332~미상)가 그린 이 작품 ‘화산도책’(華山圖?)(국부)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하나인 화산(華山)을 그린 작품이다. 아마도 100% 실경은 아니겠지만, 화가가 이곳을 여행하며 화산의 여러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고 하니 상상화도 아닐 것이다.
화산도책(華山圖?), 왕루(王履, 1332~미상)
왕루의 작품이 우리에게 눈 설게 느껴지는 건, 그림 속 산의 이미지가 우리 뇌에 각인된 산의 이미지를 한참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건 한반도의 경우 암산보다 토산이 많고, 암산이라 해도 죄 숲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과 벌목, 채광 등으로 민둥산이 드러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기껏해야 역사의 예외에 속하지 않았던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땅에 부족공동체가 형성되기 한참 전부터 한반도의 산은 숲을 거느렸다. 국가가 들어선 뒤에도 이곳 동국(東國)은 늘 산림국(山林國)이었다. 이런 독특한 생태 경관의 운치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한라산부터 백두산까지, 아니 그 너머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까지를 2시간 넘게 비행한 채 그 산세와 비경을 한 번에 살펴봐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우리는 현대 작가 오민수의 ‘산수이상-서귀포’(2018)나 조선 시대 작가 김하종(金夏鐘, 1793~미상)의 ‘혈성루망 전면금강도’(1816) 같은 작품을 감상하며 첩첩산중 장쾌한 금수강산을 마음의 붓으로 대신 그려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도 없다.
산림 아닌 산이 이 땅에 거의 없었던 까닭에 한국인의 상당수는 산과 림(숲)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한다. 산과 숲, 정확히 어떻게 구분되는 걸까? 교과서처럼 말하자면, 산은 두 개의 지각 판이 서로 충돌하여 침강하지 않고 융기한 땅을 뜻한다. 지구가 지각 판들의 충돌과 이동의 현장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한 지형물이 바로 산인 셈이다. 약 5500만 년~4000만 년 전, 대규모 융기 현상이 발생했고 이때 히말라야, 안데스, 로키 등 북반구의 주요 산맥이 형성됐다.
반면, 이론상 숲은 돌출된 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개념이다. 그곳이 어떤 지형이든 나무가 가득 들어찬 장소면 숲이라 보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가득 들어차야 숲인 걸까? 이 문제를 고민했던 세계 식량농업기구(FAO)에서는 최소면적 0.5 헥타르(한쪽은 100m, 다른 한쪽은 50m)라는 기준을 정해놓았다.
저 멀리에서 고고한 척 살아가는 암산과는 다르게 숲은 지구 물순환계, 탄소순환계의 일꾼이어서, 노는 듯 바
쁘게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숲은 ‘물의 통로’이기에 생명 또는 생태적 노동의 쾌활함을 항시 간직하는데(베르나드스키는 생명을 animated water, 즉 활동하는 물이라 불렀다.) 모이즈 키슬링(Mo?se Kisling, 폴란드 태생 프랑스 화가, 1891~1953)은 ‘프로방스 풍경’(Provence Landscape)에서 숲의 이러한 쾌활성을 화폭에 근사하게 묶어 놓았다.
프로방스 풍경(Provence Landscape), 모이즈 키슬링(Mo?se Kisling, 1891~1953)
우리가 보는 프로방스의 이 숲은 활기를 발산하고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지속적이며 자족적이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류트처럼 소리를”(리처드 윌버) 내고 있는 숲이랄까.
숲이 지닌 활기의 출처는 단지 물뿐인 걸까? 암산과는 달리, 임산(林山)은 다양한 생물을 끌어들이고 품는 곳, 즉 생물다양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강한 숲이라면 지구의 5대 생물군, 즉 박테리아, 원생생물, 균류, 식물, 동물이 밀생하기 마련인 게다. 숲이 류트처럼 소리를 내고 있다면, 그 소리는 많은 생물을 품고 있는 자의 소리다.
하지만 구체적 살림 사정이야 숲마다가 제각각일 것이다. 서글프게도 오늘 한반도 남쪽의 산림에서 우리는 숲 살림 질서의 빈 구멍을 만나기 쉽다. 빼곡한 침엽수 숲속에서 망가진 먹이그물을, 망가진 그 그물의 질서, 즉 구멍이 숭숭 난 집을 지키고 있는 일부 강인한 동물들(절지동물, 연체동물, 조류, 일부 파충류, 소수 포유류)을 보기 쉬운 것이다. 물론, 고구마나 옥수수를 먹어치우며 농부들을 괴롭히고 있는 고라니와 멧돼지들은 이 ‘빔’과 ‘망가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동물들이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