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뒷산에 올라가 놀곤 했다. 우리가 ‘뒷동산’이라 불렀던, 야트막한 동산. 그 초입에 소박한 대숲이 있었고, 가을이면 밭 밑에 떨어진 밤송이를 피해 걷곤 하던. 내게 놀이의 기억이 산 풀, 산 흙을 밟던 기억과 포개져 있는 까닭이다.
이런 체험은 아마도 특수한 체험은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조선반도 구석구석 시골 풍경에 별스런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산 밑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산과 마을을 오가며 조무래기들이 노는 풍경. 풍경에도 전통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전통의 향기가 있는 풍경일 것이다.
이 전통의 향기는 생각의 향기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대대로 산의 의미론이 삶에 선행되었다. 밥상머리 예절을 배우기도 전에 산의 의미부터 알아챘다. 산은 마을사람 모두의 ‘뒷배’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산은 모두에게 용, 수호신, 원형의 어머니, 영혼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산에 태를 묻었고, 무덤을 모셨다. 마을과 나라의 큰 제사를 산에서 지낸 것도, 고을마다 수호산을 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것이 산 밑에 마을 짓고 살았던 ‘산마을 사람들’의 정신이었다.
우천, 겸재 정선
때는 1741년.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영조대왕의 명을 받고 한강 주변을 스케치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 작업의 결과물로 나온 ‘경교명승첩’(1741~1742, 보물 제1950호)의 한 점은 ‘우천’(牛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산과 삶에 관해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천은 현재 경안천이라 부르는 강줄기로, 용인에서 발원하여 양평의 두물머리 쪽으로 이어지는 강이다.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시야에 먼저 들어오는 건 강보다는 산과 건축물이다. 첫 눈에 우리는 모종의 안온감에 젖기 쉬운데, 마치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듯 산이 집과 건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를 품고 있는 성모의 이미지가 아닌가.
앞쪽 바위, 원경의 산에 푸른 색 안료를 사용한 것도 이채롭다. 푸른 빛은 “먼 곳의 색깔”이고 “동경을 일깨우는” 색깔이라는 문장을 본 적 있는데 (한병철, ‘땅의 예찬’), 정선의 이 그림 속 ‘푸른 산’을 보니 과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듯도 하다. 푸른 빛은 아스라하다. 푸른 산은 아스라이 멀리 있지만 우리의 시원, 우리 자신의 궁극의 고향이다.
‘장강만리도’ 중 일부, 왕휘
근경의 산과 원경의 산을 중첩시키는 화면의 구조는 동아시아 전통 산수화의 기본 문법이기도 하다. 2018년 미국 보스톤에 있는 ‘미술 박물관(The Museum of Fine Arts)’은 중국 청대 화가 왕휘(1632~1717)가 그린 두루마리 작품 한 점을(제목은 장강만리도, 1699년) 어느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기증받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같은 문법이 엿보인다.
길이가 무려 53피트인 이 대작을 보노라면 겸재 정선의 한강 프로젝트가 실은 이 작품을 염두에 둔 프로젝트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둘의 창작 취지가 비슷해 보여 흥미롭다. 강을 끼고 들어선 산과 그 뒤편의 푸른 산과 집들까지, 사물 배치의 기본 구도에서 우리는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선보다는 왕휘의 기획이 좀 더 야심차서, ‘장강만리도’에는 웅혼한 대자연의 기상을 형상화하려는 뜻이 비친다. 여기서 산은 높고 견고하며 강건하고 현실 초월적이며 무궁한 대자연의 상징물이다. 물론, 그러한 상징의 정점은 맨 뒤편의 푸른 산이다.
이러한 미적 실천의 배면에는 대자연과의 합일을 인간의 이상으로 본 정신이 있었다. 현실 초월적인 대자연의 이미지는 속세에 연연하지 않는 방달한 인간의 기상과 영성을 지시하는 표상이기도 했다.(그리고 이것이 목적이었기에 전통 산수화에는 인간 말고 다른 동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달리 말한다면, 당신이 이러한 기상과 영성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장강만리도’ 같은 옛 산수화 속의 산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비밀이 동아시아 옛 산수화에는 숨어 있다.
하기야 산마다 예사로 터널을 뚫어온 전후 세대들이자 (누가 2002년~2006년의 천성산 터널 공사 논란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누가 2000개에 육박하는 전국 도로 터널을 문제 삼고 있는지) 현세 초월적이며 자연 합일적인 도가적 이상을 중시하지도 않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 같은 산의 의미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벽세청풍 2, 민정기
하지만 이런 자기 비하의 심리를 질타하는 작품들을 나는 또 알고 있다. 민정기의 최근작들은 이곳이 아직도 산마을이고 오늘의 우리가 아직 산마을 사람임을 기억하라는 일침으로 내게는 보인다. 예컨대, ‘수암동 풍경’(2011)이나 ‘벽세청풍 2’(2019) 같은 작품을 보라. 이 그림들이 보여주듯, 우리의 ‘뒷배’인 산은 제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우리가 그 사실을 외면해왔을 뿐.
이것만이 아니다. 나는 최근, 나 자신의 자기 비하(또는 한국 비하)를 거두라는, 산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잘난 너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환경부의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부동의’ 결정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 그간 우리는 어쩌면 아주 잠시 어둠에 젖어 있었을 뿐이다. 산마을 사람들의 풍속이야 모르겠으나 그 정신까지 지하 무덤에 매장된 것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믿으련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