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긴수염 동물기 서호주에서 만난 ‘행렬털애벌레’의 행진 바람 불어 끊긴 대열, 벌레들은 혼란에 빠지고…
막대기인 줄 알았는데, 길을 건너는 벌레들의 대열이었다. 긴수염 제공
서호주에 있는 피츠제럴드리버 국립공원을 걷고 있을 때였다. 멀리 막대기 같은 것이 보여 나뭇가지인 줄 알고 무심코 지나가는데, 막대기가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 피하려다 나도 모르게 봉산탈춤을 추고 말았다. 하마터면 로드킬을 할 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세히 보니 털이 숭숭난 애벌레들이 줄지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관찰을 하기 위해 쪼그려 앉았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대열이 흐트러졌고, 애벌레들은 자기 앞 벌레를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편의상 맨 앞에 있는 벌레를 1번, 끝에 있는 벌레를 6번으로 칭한다) 3번부터 6번까지는 금방 찾았는데 2번이 1번을 찾지 못해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1번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는 마치 서로 “어디 갔지???” 하며 애타게 찾는 것처럼 보였다.
1번과 2번이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2번이 결심했는지 앞으로 나아갔고 다른 벌레들도 뒤를 따랐다. 1번을 금방 포기해버린 2번이 조금 야속했지만 그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1초가 그들에게는 1년일 수도 있으니까.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내가 그들의 이동에 영향을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쪼그려 앉은 나로 인해 바람의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1번은 그들의 곁에서 계속 방황했지만 줄지은 애벌레들은 포장된 길을 한참 기어 돌이 뒤덮인 곳으로 내려갔다. 개입을 해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던 나는 결심했다. 그들을 만나게 해주기로. 아무리 기다려도 맨 앞에서 대열을 이끌던 1번이 덤불 방향으로 가지 않고 계속 다른 애벌레들을 애타게 찾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맨 앞의 애벌레가 길을 헤매면 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번이 빠르게 결심한 게 아니었을까.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1번을 들어 올려 대열의 맨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더듬거리며 마치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1번이 3번의 위치에 들어가 같이 덤불로 기어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번데기를 거쳐 나방이 되겠지? 이들은 커서 어떤 나방이 되는 것일까? 그제야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날 밤 텐트 주변에 나방 몇 마리가 나타나 팔랑거렸다. 언제나 반갑지만, 낮에 만난 애벌레들 생각이 나서 더욱 반가웠다.
한 벌레가 대열에서 떨어졌다. 긴수염 제공
나중에 구글링해보니 꽤 많은 목격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줄지어 다니기로 유명한 애벌레들이었다. 내가 본 애벌레들은 Ochrogaster lunifer 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줄지어 다니는 애벌레들을 processionary caterpillar(행렬털 애벌레)라고 부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자동차를 세우고 140마리가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는 경험담도 있었다. 애벌레들은 서로의 실크를 잡고 대열을 길게 만들어 천적의 위협을 피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누우떼가 대이동을 하듯이. 내가 긴 막대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천적들도 긴 애벌레라 생각하고 공격을 기피하는 것일까.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긴 행렬을 보고 사람들이 자동차를 세운 것 역시 알고 보면 애벌레들이 로드킬을 피하는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수염 지구별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