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생활] 용산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요맘때면 분주해지는 곳이 여러곳 있다. 서울 용산구 용산1동 전쟁기념관도 그중 하나다. 겨울철엔 관람객의 발길이 뜸하지만 벚꽃 피는 4월이 되면 매표원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호국의 달’인 6월이면 절정에 올라 월 관람객이 10여만명에 이른다. 전쟁과 분단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겠으나, 탱크와 비행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전쟁기념관에 와 본 경험, 있지 않은가.
단양 죽령전투서 극적 상봉한 ‘국군·인민군 형제’ 실화 바탕
민족화해 상징 대표 조형물…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영감 주기도 하지만 단순히 무기에 대한 애호심에 이끌려 전쟁기념관에 갔더라도 기념관 앞 마당에 놓여있는 <형제의 상>을 무심코 지나치기는 힘들다. 화강암 조각으로 쌓아올린 돔 위에 서 있는 높이 11m짜리 대형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94년 조각가 최영집·윤성진씨와 화가 장혜용씨가 공동 작업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국군 장교인 형(박규철)과 인민군 병사인 동생(박용철)이 전장에서 상봉했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이 고향이었던 이 형제는 분단 이후 헤어져 살다가 각각 국군과 인민군으로 참전해 단양군 죽령전투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됐고, 이후 이 장면을 목격했던 동료 병사의 손에 의해 수필로 엮여져 세상에 알려졌다.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 무렵, 여러번 이곳을 찾아와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기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장동건’과 ‘원빈’인 셈이다. 전쟁기념관 이운세 홍보부장은 “12년전 전쟁기념관이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껴안고 있는 조형물이 이념에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으나 이젠 민족의 화해를 상징하는 전쟁기념관의 대표 조형물이 됐다”고 말한다. 십여년전엔 획기적인 작품이었겠지만, 요즘 눈으로 다시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인민군인 동생은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롭게 국군 형의 품에 안겨 있다. 체력단련실에서 막 빠져나온 듯 건장한 국군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것 같은 인민군이 확연히 대조되는 작품이다. 체제의 우월성을 체격의 우위로 도식화한 것은 아닐까.
<형제의 상>을 받치고 있는 돔으로 들어가보면, 한국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에 눈이 머물게 된다. 36만여개의 타일을 이용해 전쟁을 기록한 사진들을 몽타주기법으로 엮어 표현했다. 하늘엔 B29가 날고,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탱크가 돌진한다. 무덤 위엔 주인 잃은 총과 빈 철모가 꽂혀 있다. 그런데 이 철모엔 전쟁기념관 초대 관장을 지낸 고 이병형씨의 소속부대인 ‘백골부대’의 심볼(해골과 뼈)이 그려져 있다. 모자이크 벽화를 만든 작가 김병수씨는 “백골부대 마크를 만들라는 지시를 따랐더니 해골의 눈이 박정희 대통령의 선글라스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세번이나 바꿔야 했다”고 회고한다. 권력은 작은 타일 조각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작품은 남았다. 그곳에 가서 오늘을 다시 보자.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민족화해 상징 대표 조형물…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영감 주기도 하지만 단순히 무기에 대한 애호심에 이끌려 전쟁기념관에 갔더라도 기념관 앞 마당에 놓여있는 <형제의 상>을 무심코 지나치기는 힘들다. 화강암 조각으로 쌓아올린 돔 위에 서 있는 높이 11m짜리 대형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94년 조각가 최영집·윤성진씨와 화가 장혜용씨가 공동 작업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국군 장교인 형(박규철)과 인민군 병사인 동생(박용철)이 전장에서 상봉했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이 고향이었던 이 형제는 분단 이후 헤어져 살다가 각각 국군과 인민군으로 참전해 단양군 죽령전투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됐고, 이후 이 장면을 목격했던 동료 병사의 손에 의해 수필로 엮여져 세상에 알려졌다.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 무렵, 여러번 이곳을 찾아와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기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장동건’과 ‘원빈’인 셈이다. 전쟁기념관 이운세 홍보부장은 “12년전 전쟁기념관이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껴안고 있는 조형물이 이념에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으나 이젠 민족의 화해를 상징하는 전쟁기념관의 대표 조형물이 됐다”고 말한다. 십여년전엔 획기적인 작품이었겠지만, 요즘 눈으로 다시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인민군인 동생은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롭게 국군 형의 품에 안겨 있다. 체력단련실에서 막 빠져나온 듯 건장한 국군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것 같은 인민군이 확연히 대조되는 작품이다. 체제의 우월성을 체격의 우위로 도식화한 것은 아닐까.
<형제의 상>을 받치고 있는 돔으로 들어가보면, 한국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에 눈이 머물게 된다. 36만여개의 타일을 이용해 전쟁을 기록한 사진들을 몽타주기법으로 엮어 표현했다. 하늘엔 B29가 날고,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탱크가 돌진한다. 무덤 위엔 주인 잃은 총과 빈 철모가 꽂혀 있다. 그런데 이 철모엔 전쟁기념관 초대 관장을 지낸 고 이병형씨의 소속부대인 ‘백골부대’의 심볼(해골과 뼈)이 그려져 있다. 모자이크 벽화를 만든 작가 김병수씨는 “백골부대 마크를 만들라는 지시를 따랐더니 해골의 눈이 박정희 대통령의 선글라스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세번이나 바꿔야 했다”고 회고한다. 권력은 작은 타일 조각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작품은 남았다. 그곳에 가서 오늘을 다시 보자.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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