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화교 인구 변화
임오군란 이후 첫발…양국수교 뒤 최고 전성기
화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다. 청군이 진주하면서 들어오기 시작한 화교들은 탁월한 장사 솜씨로 무역업·한방업·상업·음식업 분야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시절 문을 연 것이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국요릿집 공화춘이다.
화교는 1937년 중-일 전쟁과 이후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국내로 대이동했다. 주로 산둥성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전쟁을 피해 대거 인천으로 들어오면서 화교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 말기인 1943년 국내 화교는 8만명을 넘기도 했다. 특히 해방 뒤 한국의 정치적 혼란기는 화교들의 최전성기였다. 1946년 한국의 전체 수입액 가운데 82%가 화교 상인들에 의한 것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한국 화교들은 남북분단과 6·25전쟁으로 그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남한과 중국 본토와의 외교가 단절되고 이승만 정부 이후 외환거래 규제, 무역업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차별 정책이 계속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한국에 남은 일부 화교들은 대부분 음식업에 종사했다. 류장샨 대구재한중국교민협회 외무부장도 80년대 초 화교들에 대한 차별이 싫어 대만으로 떠났다가 10여년 전 ‘고향’인 한국이 그리워 돌아왔다. 류 부장은 “대만에 가면 한국음식점의 태반을 한국에 살던 화교들이 운영한다”며 “한국에서는 ‘중국인’이고, 대만에 가면 ‘한국인’인 것이 화교들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고여 있던 한국 화교 사회에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다. 주로 음식업에 종사하던 화교들은 규제 완화에 따라 무역업·여행업 등으로 일을 바꾸는 이가 생겨났다. 또 본토 중국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대만 국적의 ‘구화교’를 대신해 한국 내 중국인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조선족 제외)이 18만명, 대만 국적 구화교는 2만400여명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한국계 중국인인 조선족도 약 38만명이나 들어왔다. 한국 내의 체류 중국인 규모는 평상시로는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박영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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