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 앞 재개발 예정지에서 주민인 권영일씨가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처럼 개발될 자신의 동네를 가리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일대 재건축 7~15층 16개동 추진
정체성 훼손돼 등재 취소 우려도
정체성 훼손돼 등재 취소 우려도
서울 성북구 정릉2동에 위치한 정릉(사적 제208호)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는 사냥에 나선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자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넨 일화로 유명하다.
애초 태조는 신덕왕후가 숨지자 도성 안 정동(영국대사관 자리)에 정릉을 조성했으나,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이를 도성 밖 지금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정릉은 북한 지역에 있는 제릉, 후릉을 빼고 우리나라에 있는 태릉, 의릉, 선릉 등의 39기의 조선능과 함께 지난해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 건국 뒤 최초로 조성된 왕릉이자 세계유산인 정릉이 아파트 숲에 둘러싸일 위기에 놓였다. 정릉동 506-50번지 일대(정릉 제6구역)에서 주택재건축 정비사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조합설립인가 절차와 올 초 시공사 선정 작업을 마친 이 일대는 사업시행인가 신청 등 재건축사업이 본격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이곳에는 7층~15층 아파트 16개동 710세대가 들어선다.
재건축을 하려면 앞으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허가를 거쳐야 하지만 어렵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 5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에 55m 고층 건물을 짓는 서울시 재개발 사업안을 통과 시킨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재건축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시름겹다. 현재 이곳에는 단독주택과 4층 이하의 야트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콘크리트 고층 건물이 시야를 가리는 도심과 달리 하늘길이 넓고 크게 펼쳐진다. 골목길은 살아있고, 차보다 사람들이 다니기 쉽다. 주민 권영일(58)씨는 “아름답고 멀쩡한 동네를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며 철거하고, 획일적인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로 채우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정릉 주변의 한적한 풍광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공인중개업소를 운영하는 주민 손아무개(54)씨는 “재건축에 찬성하는 주민들은 재건축을 하면 막대한 개발이익을 얻는 줄 알지만, 인근 지역의 사례를 보면 많게는 2~3억원의 분담금을 내야하는 등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곳에 입주하지 못하고 쫓겨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세계문화유산인 정릉의 정체성 상실을 우려한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인공 건축물을 설치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취소된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며 “이 일대는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 70년대 집단주택단지 ‘교수단지’도 있어, 개발 보다 보존과 리모델링에 무게를 둬야한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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