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 모여 사는 젊은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을의 추억을 기록했다. 마을에 핀 이름 모를 풀들에 화분을 그려주고, 주민들을 집으로 초대해 초상사진을 찍으며, 직접 재단한 양복을 고객에게 입힌 뒤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책 작가 제공
사진·그림·국악·요리 등 각분야 전문가들 6년 생활
주민동네 등 이야기 모아 ‘이태원 주민일기’ 펴내
주민동네 등 이야기 모아 ‘이태원 주민일기’ 펴내
작업실 문 아래쪽 틈새에 이름 모를 풀이 돋았다. 생명은 가득차고 넘쳐서 딱딱한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나와 기어이 제모습을 완성한다. 돌보는 이 하나 없는데도, 이 작은 식물은 빛과 공기와 바람만으로 싱그럽게 피어나 푸른빛을 뽐낸다.
윈도우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본명 강민정·32)은 붓을 들어 그 작은 풀 아래에 꼭 그만한 작은 화분을 그린다. 생명은 이웃집 문 앞, 돌담 사이, 그늘진 담장 밑에서도 발랄하게 피어난다.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는 풀잎에 화분을 선물해주고, 돌담에 웅크려 그 틈새에 뿌리박고 사는 생명들과 재잘거리는 주민 덕에 마을은 이내 경쾌해진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동네는 작은 풀 한포기까지도 또렷한 땅이다. 이곳에는 오랜 시간 함께 모여, 마을 이야기를 기록해온 주민들이 있다. 나난, 사이이다(본명 김윤희·33), 장진우(25), 홍민철(24), 박길종(29), 목정량(27), 곽호빈(24), 황애리(24), 이해린(28) 등 9명의 주민들이 그 주인공이다. 모두 이태원에 모여 사는 젊은 예술가들이다.
이들은 마을 곳곳에 핀 작은 풀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나난), 재개발로 사라질 집에서 주민들을 초대해 초상화를 찍어주고(사이이다), 주민들의 집으로 찾아가 요리를 만들어준다(장진우). 또 이태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코스를 소개하며 이태원의 골목골목을 알리는가 하면(홍민철), 주민들이 버린 물건을 새롭게 가공해 주민들에게 전시·판매하고(박길종), 이웃에게 친환경 누리집을 만들어준다(목정량). 직접 재단한 양복을 판매하며 고객과 함께 이태원 명소도 소개하고(곽호빈), 주민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가 하면(황애리), 퇴근길에 동네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이해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난해 6월부터 ‘주민일기’를 써온 자생적인 프로젝트는 6년 전 이태원으로 이사온 사진작가 사이이다의 소박한 꿈에서 시작됐다. 그는 “흔히 어느 지역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며 “부동산 가격과 교육 여건으로 가치가 매겨지고 평가되는 동네가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솟아오르는 마을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뜻에 8명의 예술가가 힘을 보탰고, 이를 한데 묶으니 <이태원 주민일기>라는 책 한 권이 오롯이 남았다.
책이 나오는 18일 오후 7시30분 용산아트홀 소극장에서 9명의 작가들은 주민들과 함께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들은 주민들을 초청해 마을 이야기를 함께 나눌 예정이다. 이들의 다음 계획은 뭘까? “이태원 주민일기를 시작으로 용산 구민일기, 서울 시민일기, 대한민국 국민일기를 써보고 싶어요.” 사이이다가 말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그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골목길에서 이태원 주민들의 삶의 신명은 온 마을에 닿고 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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