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춘천농민회 회원들이 공동 출자해 2001년 춘천시 칠전동에 세운 농민주유소에서 김경희(왼쪽 둘째) 대표이사가 지난 11일 주유소 직원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영농희망 키우는’ 경춘국도 10년 터줏대감
농민들 생산비 절감 위해 시작
외상은 예사…신뢰로 단골 늘려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 등 박차
농민들 생산비 절감 위해 시작
외상은 예사…신뢰로 단골 늘려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 등 박차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경춘국도 서울방향 들머리에 자그마한 주유소가 있다. 허름한 간판엔 ‘농민주유소’라고 적혀 있다. 낡은 주유기 탓에 주유금액의 끝자리를 천원 단위로 맞추기도 쉽지 않은 그곳은 말 그대로 농민이 운영한다. 춘천 일대에선 제법 견실한 주유소로 이름이 나 있다.
“이 근처에 주유소가 일곱 군데 있었다. 그새 두 곳은 망해서 문을 닫았고, 네 군데는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0년 세월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건 우리뿐이다.” ‘주유소장’으로 출발해 어느덧 ‘대표이사’란 그럴듯한 직함을 얻은 김경희(42)씨가 웃으며 말했다.
농민주유소는 춘천농민회가 경제사업으로 회원들의 출자를 받아 2001년 9월 문을 열었다. 시설농업을 하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달래려 시작한 사업이라 애초 이문 남기기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지난해 올린 49억원가량 매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면세유는 최장 120일까지 외상이다. 농민들의 돈이 마르는 시기엔, 파종부터 출하 때까지 길게는 5개월가량 늦춰주기도 한단다.
김씨는 “농민회가 주유업계에 뛰어들면서 농협이 독점하던 면세유 시장에 경쟁이 시작됐고 이젠 면단위 농협에서도 면세유 값을 정할 때 농민주유소 가격부터 살핀다”고 말했다.
주유소로 출발한 춘천농민회 영농조합(춘천우리영농조합)은 지난 10년 동안 제법 몸집을 키웠다. 농약·농자재를 공급하는 ‘우리농약사’를 계열사로 뒀고, 농민회와 지역 영농조합이 함께 출자해 만든 ‘농민한우’라는 자회사까지 거느리게 됐다. 축산 농민이 식육판매와 식당까지 겸하는 농민한우는 최근 2호점을 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주변 주유소에 견줘 기름값이 싼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건 켜켜이 쌓아온 믿음 때문이다. 기름의 질과 양을 속이지 않으니 입소문을 타고 단골이 늘었다. 기름값 10~20원 올라도 발길 돌리지 않는 이들이다. 봄이면 손님에게 토마토 따위 모종을 나눠주기도 하고, 수확철엔 조합원들이 직접 농사지은 호박이며 가지 따위를 돌리기도 한다. 면세유를 쓰는 농민들 말고도, 오가며 들르는 ‘과세유’ 단골이 줄지 않는 비결이다.
위기가 왜 없었을까? 지난해엔 창업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던 출자자 배당을 처음으로 걸렀다. 김씨는 “현 정부가 들어선 뒤 2009년 말 국세청이 전국 15개 지역에서 농민회가 운영하는 영농조합에 대해 세무조사를 벌였다”며 “우리도 6억원에 이르는 추징금을 내게 돼 배당을 못 했다”고 말했다.
어느새 맞이한 창립 10돌, 춘천농민회는 20일 한마당 큰 잔치판을 열었다. 또 지난 10년 경제사업을 돌아보는 토론회도 준비중이다. ‘친환경 무상급식 확대에 발맞춰 영농조합 차원에서 생산자가 직접 납품할 수 있는 직거래 유통구조를 갖춰보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김덕수(41) 춘천농민회 사무국장은 “농민 권익 실현이란 목표 아래 생산비 절감 차원에서 주유사업을 시작했지만, 최근 몇 년 새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라며 “장기적으로 농산물 공동생산·공동판매를 위한 유통구조 마련을 핵심 과제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춘천/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춘천/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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