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금정굴유족회 마임순(65·사진 왼쪽) 회장과 이경숙(64·오른쪽) 총무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발굴에서 국가배상 판결까지…
1993년 유족회 결성 규명 나서, 연좌제에 비명…150여구 확인
“우리대에서 비극 끝내자 각오” 겉도는 위령사업에 안타까움
1993년 유족회 결성 규명 나서, 연좌제에 비명…150여구 확인
“우리대에서 비극 끝내자 각오” 겉도는 위령사업에 안타까움
“끔찍했던 역사적 비극과 상처를 다음 세대로 넘기지 말고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심정으로 20년 동안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5일 승소한 피해자 ‘며느리’들인 고양금정굴유족회 마임순(65·사진 왼쪽) 회장과 이경숙(64·오른쪽) 총무는 16일 기막혔던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10월 마 회장의 남편 안아무개(66)씨의 가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중학교 3학년이던 큰형, 초등학교 5학년 작은형 등 3대 5명이 고양경찰서에 끌려가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작은아버지 가족이 월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복을 우려한 치안대원들은 ‘남자의 씨를 말린다’며 친척집까지 샅샅이 뒤져 어린 자녀들까지 잡아갔다고 한다. 다행히도 다섯살이던 마 회장의 남편 안씨는 친척 할아버지가 항아리에 숨겨줘 화를 면했다.
이경숙 총무의 시아버지(한국전쟁 당시 27살)는 둘째를 임신한 23살의 부인과 네살배기 아들을 남겨둔 채 고양시 신평동 집에서 경찰에 붙들려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시어머니(84)는 남편을 기다리다 10년이 지나자 제사상을 차렸다. 제삿날은 경찰이 닥친 1950년 10월14일 밤이다. 그로부터 45년 세월이 흐른 1995년 9월30일 금정굴 지하에서 평소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시아버지의 도장이 발견됐다.
부모를 잃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유족들은 연좌제 굴레로 차별대우까지 받아 대부분 가난했고, 진실 규명을 요구할 용기도 내기 어려웠다.
마 회장 등 여섯 가족이 1993년 유족회를 결성했고 1995년 금정굴에서 유해(최소 153구)와 유품들을 발굴하자, 유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회원이 150명을 넘어섰다. 유해는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 15년 넘게 보관돼 있다가 지난 9월 일산동구 설문동 청아공원에 임시로 안치돼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진실 규명 결정을 하며 역사평화공원과 유해 안치시설의 조성을 권고했고, 이번에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유족들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1부(재판장 전광식)는 15일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 33명의 유가족 92명이 낸 소송에서 ‘국가는 불법행위의 책임을 지고 유가족 92명에게 52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61년이 지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은 진행형이다. 유족들은 국가 배상 판결도 난 만큼 하루속히 위령사업이 시작되길 바라지만, 여전히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에 시달린다고 했다. 고양시의회가 최근 고양시의 내년 예산안을 심의하면서 금정굴을 고양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의 실시설계 예산 4억5000만원을 전액 삭감한 것이다. 보수 단체들은 고양시청 앞에서 이 사업 추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왔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서 금정굴 사건을 맡았던 신기철(48)씨는 “고양 금정굴은 체계적 학살이 자행된 고양경찰서의 공식 처형장으로, 희생자의 유골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며 “희생자들의 신원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경로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신씨는 1950년 9~10월 전국 200개 경찰서에서 금정굴과 같은 처형장을 1~2개씩 운영했으며 그곳에서 4만~6만명의 민간인이 재판 없이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양/글·사진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서 금정굴 사건을 맡았던 신기철(48)씨는 “고양 금정굴은 체계적 학살이 자행된 고양경찰서의 공식 처형장으로, 희생자의 유골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며 “희생자들의 신원을 모두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경로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신씨는 1950년 9~10월 전국 200개 경찰서에서 금정굴과 같은 처형장을 1~2개씩 운영했으며 그곳에서 4만~6만명의 민간인이 재판 없이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양/글·사진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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