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기관사 자살 부른 공황장애
성인남성의 7배 높아…외상후스트레스·우울증 호소
도시철도노조 “보완장치 없는 1인 승무제 폐지해야”
성인남성의 7배 높아…외상후스트레스·우울증 호소
도시철도노조 “보완장치 없는 1인 승무제 폐지해야”
온몸에서 힘이 쑥 빠졌다. 느닷없이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장은 터질듯 두근거렸다. “또 시작이구나…. ”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커먼 어둠 속의 터널을 뚫고 가는 전동차 안에서, 기관사 손정락(41)씨는 혼자였다.
무언가를 참는 일은 기관사의 숙명이다. 1998년 서울시의 지하철 5~8호선을 운행하는 도시철도공사의 기관사가 된 뒤 손씨는 쉼없이 3~4시간씩 운전하며 산소부족으로 찾아오는 몽롱한 졸음을 견디고, 공복감을 참고, 화장실 가는 일까지 조절해왔다.
하지만 기관사 생활 7년 만에 발병한 ‘공황장애’를 이겨내는 일은 손씨의 능력밖이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갑자기 심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처음엔 운전 중일 때만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어둡고 좁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때도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럼증이 도져 몸이 휘청거렸다. 나중에는 대형마트처럼 창문이 없는 공간엔 들어갈 수가 없게 됐다.
지난 12일에는 자신과 같은 공황장애를 앓던 동료 기관사 이아무개(43)씨가 서울지하철 5호선 왕십리역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손씨는 “공황장애를 앓으면 몸과 정신이 모두 바닥을 친다”며 “곧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고통스런 느낌이 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도시철도 기관사들에게 공황장애는 낯선 질병이 아니다. 서울도시철도노동조합의 자료를 보면 2003년 여름 기관사 두 명이 연이어 공황장애를 동반한 정신질환으로 자살한 뒤 2006년 8월까지 32명이 정신질환에 걸렸고 그 가운데 11명이 산업재해 승인을 받았다. 2007년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이 836명의 서울도시철도 소속 기관사들을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공황장애를 앓는 비율이 성인남성에 비해 7배 높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4배, 주요 우울증은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철도 기관사의 정신질환 비율이 특히 높은 까닭에 대해 산업의학과 전문의인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은 “지상노선 없이 지하노선만을 달리면서 수천명의 승객을 수송하는 데 따른 업무상 스트레스도 있겠지만 1인 승무를 하면서 받는 압박감이 특히 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수동운전을 하는 서울메트로 구간인 1~4호선은 전동차 앞뒤에 기관사와 차장이 함께 타는 2인 승무제를 시행하지만, 자동운전 시스템을 갖춘 도시철도 5~8호선은 1인 승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1인 승무제가 승객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동운전 시스템이라도 출입문과 스크린도어 통제, 안내방송 같은 업무까지 기관사 혼자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신호나 차량 고장 등의 문제가 생길 때 신속한 대처가 어렵다는 것이다.
도시철도노조는 13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원순 서울시장은 기관사가 실수할 경우 보완장치가 없는 도시철도의 1인 승무제를 폐지해, 기관사의 건강권과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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