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 만년초등학교의 ‘또래 조정자’ 어린이들이 지난 2일 모둠을 이뤄, 창수와 진수가 화장실 청소 문제를 다투는 시나리오를 듣고서 갈등의 정도와 원인을 찾는 ‘양파 분석’을 하며 토론하고 있다.
[충청·강원 쏙] ‘또래조정’으로 학내 갈등 푸는 대전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 같은 교육 현장의 난제를 학생들이 스스로 풀어낼 수 있다? 이른바 ‘또래조정’이 학교 현장에 번지고 있다. 대전에선 지난해 4곳에서 올해 모든 초·중·고교 246곳으로 확대했다는데….
학교폭력이나 따돌림을 아이들이 스스로 풀어낼 수 있을까? ‘아이들 문제는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고들 한다. 교육부가 또래 조정 프로그램을 전국에서 시범 시행한 지 만 1년이 지났다. 2년째 시범학교로 운영한 대전의 중학교 4곳의 또래 조정 담당 교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시작했는데 매우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 또래 조정자, 학교폭력 해결사로 지난 5월 또래 조정 시범학교로 지정된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같은 반 학생들이 온라인 투표를 했다. ㄱ양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온라인으로 공개 투표를 한 것이다. 싫어한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ㄱ양의 부모는 “반 아이들이 딸을 왕따시켰다”며 투표에 참여한 학생들을 처벌해달라는 진정을 교육 당국에 냈다. 학생들 사이에선 흉흉한 괴담이 나돌아 사태가 번져갔다. 명백한 사이버 학교폭력에 해당됐다.
학교 쪽은 투표를 한 학생들과 ㄱ양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 뒤 이들에게 ‘또래 조정’을 받도록 권유했다. 또래 조정은 예비 조정과 본 조정 2차례 등 모두 3차례 이어졌다. 또래 조정자들은 ㄱ양이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반 친구들에게 오해를 받아 왔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투표한 친구들은 따로 놀면서 공부를 잘하는 ㄱ양을 미워하다 우연히 투표를 했고, 공개적으로 온라인에서 이런 투표를 하는 게 잘못인지도 몰랐다. 뒤늦게 친구들은 ㄱ양에게 “미안하다. 앞으로 잘 지내자”며 악수를 청했다. 조정 과정을 지켜본 ㄱ양 아버지가 진정을 취하하자, 학교는 징계위원회를 취소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두달째 ㄱ양과 투표했던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대전 한 중학교
1~3학년 각반 투표로 조정자 뽑아
온라인상 정서폭력까지 중재 나서 대전 만년초등학교
5~6학년 20명 또래조정 교육 한창
“벌써 교실서 친구들 다툼 풀었어요” 대전 모든 학교 ‘또래조정’ 도입
1년간 시범학교 4곳서 22건 해결
미국선 초·중·고 75%가 시행 중 좋은 조정자 양성이 핵심
갈등조정센터서 그림·게임 교육
대전·충청지역서 600여명 활약 이 학교 또래 조정자는 1~3학년생 19명이다. 또래 조정자들은 각 반에서 ‘나를 도와줄 것 같은 믿을 만한 친구’를 뽑는 무기명 비밀투표를 거쳐 선발됐다. 반 친구들한테서 평균 80%의 지지를 받았다. 학교는 먼저 이들이 갈등조정센터의 또래 조정자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고는 학교 곳곳에 이들의 사진과 명단을 내걸었다. ‘갈등이나 교우관계, 학교폭력 등 고민거리가 있으면 또래 조정자를 지정할 수 있다’는 안내 문구와 함께. 또래 조정자들은 임명장과 배지를 받고서, 봉사활동 내용이 학교생활기록부에도 기록된다. 5일 대전시교육청의 집계를 보면, 대전에서 지난해 1년 동안 246개 각급 학교 자치위원회에서 심의한 학교폭력은 사소한 정서폭력 600여건을 포함해 700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2학기에 선발된 대전지역 시범학교 4곳의 또래 조정자들이 두달 남짓 동안 조정한 건수는 25건이었으며, 이 가운데 22건이 해결됐다. 대전시교육청 학생생활안전과 오창석 장학사는 “시범학교 4곳의 올해 또래 조정 실적은 학교당 7~10건으로, 사소한 정서폭력이나 웬만한 갈등은 또래 조정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시교육청은 올해엔 광역 시·도교육청으로는 처음으로 대전지역 모든 초·중·고교 246곳에 또래 조정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 초등학생들이 갈등 조정을? 중·고교생은 시범 운영을 거쳐 성과를 확인했다지만, 초등학생들이 따돌림, 학교폭력 같은 갈등을 조정할 수 있을까? 지난 2일 오후 대전 서구 만년초등학교의 또래 조정자 수업 교실을 찾았다. 드러난 갈등의 양상과 숨어 있는 원인을 찾아내는 이른바 ‘양파 분석’ 수업이 한창이었다. 5~6학년생 또래 조정자 20명이 모둠을 나눠 양파 분석을 했다. 갈등 시나리오는 ‘반장인 창수가 진수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자 진수가 이를 거부하면서 빚어진 다툼’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다. “창수는 반장이니까 책임을 다하려고 청소를 시킨 거고, 진수는 지시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청소를 안 하겠다고 해 싸운 거죠.” 남학생 2명과 여학생 4명으로 꾸려진 1모둠이 분석 결과를 발표하자 다른 모둠 어린이들이 박수를 쳤다. 2모둠 어린이들은 “창수가 선생님께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아 반 학생들에게 전달했으므로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풀었다. 진수는 외국에서 살다 귀국해, 반장이 지시한 것이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게 익숙지 않다는 점도 갈등의 배경이라고 분석해냈다. 이어 갈등을 조정할 방안을 찾기 위한 자유토론(브레인스토밍)을 벌였다. 5학년생 방채원(12)양은 “수업을 다 마치고 또래 조정 교육을 받는 것이 좀 힘들지만, 친구들이 다툴 때 풀어주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어서 재미도 있고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래 조정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이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비밀 유지’, ‘중립 지키기’, ‘충분히 들어주기’라고 또렷하게 답변했다. 수업 내용이 어렵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장예나(12·5년)양은 손을 번쩍 들며 “재미있다. 벌써 조정을 해봤다”고 했다. “지난주에 교실에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다퉜어요. 남자애들이 점심시간에 고무줄총 놀이를 했는데, 고무줄을 쏘고 시끄러웠어요. 여자애들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고무줄총을 뺏으려고 하니 더 시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지난주에 배운 대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스스로 ‘놀이는 하되 싫어하는 애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자’고 합의하더라고요. 소동이 끝났어요.” 장양은 “친구들이 나더러 해결사래요”라며 자랑했다. 초등학생들도 또래 조정을 너끈히 해내는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 또래 조정이란? 왕따, 집단 괴롭힘, 학교폭력 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대안적 방안으로 또래 조정이 주목받고 있다. 또래 조정(peer mediation)은 1983년 미국 롱아일랜드 브라이언트 고등학교에서 처음 시도됐다. 학교폭력이 줄고 학생들의 태도나 인간관계가 회복되는 효과를 내자 지금은 미국 초·중·고등학교 75%가 시행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북아일랜드,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도 비슷한 또래 조정 프로그램이 보급되고 있다. 국내에선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가 수도권 일부 학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하면서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되고 있다. 또래 조정의 핵심은 좋은 조정자들을 발굴하는 것이다. 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가 함께 운영하는 ‘갈등조정센터’의 코치 16명이 또래 조정 프로그램을 확산시키며 또래 조정자를 길러내고 있다. 학생들은 갈등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귓속말 의사소통하기 게임을 통해 말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체험하는 식으로 갈등 조정 방법을 체득한다. 불 위에서 끓는 솥 그림을 보며 분노의 강도를 느끼고, 저울이나 두 팔 벌린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며 또래 조정자의 중립적인 모습을 익힌다. 대전·충청지역에서 학생 600여명이 또래 조정자로 활약하고 있다. 대전경실련 갈등조정센터 이광진 실무 책임자는 “아이들 갈등은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는 점에서, 리더십 있고 신뢰받는 학생들이 ‘또래 조정’으로 풀어내는 것이 학교폭력 문제를 푸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확신하듯 말했다. 글·사진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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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교실서 친구들 다툼 풀었어요” 대전 모든 학교 ‘또래조정’ 도입
1년간 시범학교 4곳서 22건 해결
미국선 초·중·고 75%가 시행 중 좋은 조정자 양성이 핵심
갈등조정센터서 그림·게임 교육
대전·충청지역서 600여명 활약 이 학교 또래 조정자는 1~3학년생 19명이다. 또래 조정자들은 각 반에서 ‘나를 도와줄 것 같은 믿을 만한 친구’를 뽑는 무기명 비밀투표를 거쳐 선발됐다. 반 친구들한테서 평균 80%의 지지를 받았다. 학교는 먼저 이들이 갈등조정센터의 또래 조정자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고는 학교 곳곳에 이들의 사진과 명단을 내걸었다. ‘갈등이나 교우관계, 학교폭력 등 고민거리가 있으면 또래 조정자를 지정할 수 있다’는 안내 문구와 함께. 또래 조정자들은 임명장과 배지를 받고서, 봉사활동 내용이 학교생활기록부에도 기록된다. 5일 대전시교육청의 집계를 보면, 대전에서 지난해 1년 동안 246개 각급 학교 자치위원회에서 심의한 학교폭력은 사소한 정서폭력 600여건을 포함해 700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2학기에 선발된 대전지역 시범학교 4곳의 또래 조정자들이 두달 남짓 동안 조정한 건수는 25건이었으며, 이 가운데 22건이 해결됐다. 대전시교육청 학생생활안전과 오창석 장학사는 “시범학교 4곳의 올해 또래 조정 실적은 학교당 7~10건으로, 사소한 정서폭력이나 웬만한 갈등은 또래 조정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시교육청은 올해엔 광역 시·도교육청으로는 처음으로 대전지역 모든 초·중·고교 246곳에 또래 조정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 초등학생들이 갈등 조정을? 중·고교생은 시범 운영을 거쳐 성과를 확인했다지만, 초등학생들이 따돌림, 학교폭력 같은 갈등을 조정할 수 있을까? 지난 2일 오후 대전 서구 만년초등학교의 또래 조정자 수업 교실을 찾았다. 드러난 갈등의 양상과 숨어 있는 원인을 찾아내는 이른바 ‘양파 분석’ 수업이 한창이었다. 5~6학년생 또래 조정자 20명이 모둠을 나눠 양파 분석을 했다. 갈등 시나리오는 ‘반장인 창수가 진수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자 진수가 이를 거부하면서 빚어진 다툼’을 소재로 한 내용이었다. “창수는 반장이니까 책임을 다하려고 청소를 시킨 거고, 진수는 지시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청소를 안 하겠다고 해 싸운 거죠.” 남학생 2명과 여학생 4명으로 꾸려진 1모둠이 분석 결과를 발표하자 다른 모둠 어린이들이 박수를 쳤다. 2모둠 어린이들은 “창수가 선생님께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아 반 학생들에게 전달했으므로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풀었다. 진수는 외국에서 살다 귀국해, 반장이 지시한 것이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게 익숙지 않다는 점도 갈등의 배경이라고 분석해냈다. 이어 갈등을 조정할 방안을 찾기 위한 자유토론(브레인스토밍)을 벌였다. 5학년생 방채원(12)양은 “수업을 다 마치고 또래 조정 교육을 받는 것이 좀 힘들지만, 친구들이 다툴 때 풀어주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어서 재미도 있고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래 조정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이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비밀 유지’, ‘중립 지키기’, ‘충분히 들어주기’라고 또렷하게 답변했다. 수업 내용이 어렵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장예나(12·5년)양은 손을 번쩍 들며 “재미있다. 벌써 조정을 해봤다”고 했다. “지난주에 교실에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다퉜어요. 남자애들이 점심시간에 고무줄총 놀이를 했는데, 고무줄을 쏘고 시끄러웠어요. 여자애들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고무줄총을 뺏으려고 하니 더 시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지난주에 배운 대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스스로 ‘놀이는 하되 싫어하는 애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자’고 합의하더라고요. 소동이 끝났어요.” 장양은 “친구들이 나더러 해결사래요”라며 자랑했다. 초등학생들도 또래 조정을 너끈히 해내는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 또래 조정이란? 왕따, 집단 괴롭힘, 학교폭력 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대안적 방안으로 또래 조정이 주목받고 있다. 또래 조정(peer mediation)은 1983년 미국 롱아일랜드 브라이언트 고등학교에서 처음 시도됐다. 학교폭력이 줄고 학생들의 태도나 인간관계가 회복되는 효과를 내자 지금은 미국 초·중·고등학교 75%가 시행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북아일랜드,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도 비슷한 또래 조정 프로그램이 보급되고 있다. 국내에선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가 수도권 일부 학교를 시범학교로 지정하면서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되고 있다. 또래 조정의 핵심은 좋은 조정자들을 발굴하는 것이다. 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가 함께 운영하는 ‘갈등조정센터’의 코치 16명이 또래 조정 프로그램을 확산시키며 또래 조정자를 길러내고 있다. 학생들은 갈등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귓속말 의사소통하기 게임을 통해 말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체험하는 식으로 갈등 조정 방법을 체득한다. 불 위에서 끓는 솥 그림을 보며 분노의 강도를 느끼고, 저울이나 두 팔 벌린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며 또래 조정자의 중립적인 모습을 익힌다. 대전·충청지역에서 학생 600여명이 또래 조정자로 활약하고 있다. 대전경실련 갈등조정센터 이광진 실무 책임자는 “아이들 갈등은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는 점에서, 리더십 있고 신뢰받는 학생들이 ‘또래 조정’으로 풀어내는 것이 학교폭력 문제를 푸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확신하듯 말했다. 글·사진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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