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쏙] 군산의 옛 도심 살리기 프로젝트
군산내항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쌀 창고, 정미소, 은행, 적산가옥, 무역회사…. 군산시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주목해 건축관·전시장·카페로 되살려냈다. 문화·예술인들도 상상력을 보태고 있다는데….
9일 오후 전북 군산시 장미동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국가 등록문화재 374호)을 찾았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무대가 되었던 건물은 ‘근대건축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미동은 일제의 쌀 수탈 창구였던 도시 군산을 상징한다. 꽃 이름이 아니라, 쌀을 저장(장미·藏米)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작은 포구였던 군산은 1899년 5월 개항 직후 일본인이 쌀을 강제 수출하려고 개발한 새도시였다. 개항장 거리엔 쌀 창고·정미소·은행 등이 밀집했다. 군산내항에 있던 장미동에는 호남평야의 쌀이 정미소에서 가공돼 일본으로 송출되고 금융조합을 통해 돈으로 환산돼 유통되던 과거의 흔적과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는 내용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1922년 건립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대표적 금융기관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은행, 한일은행의 군산지점으로 변했다가 유흥주점 간판이 달린 적도 있다.
군산시는 이 붉은 벽돌 건물을 매입해 근대건축관으로 꾸몄다. 근현대사의 아픔과 눈물, 저항과 인내, 희망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김경현(38·서울)씨는 “휴가를 맞아 전국일주를 하던 중 인터넷에서 개관 소식을 보고 방문했다.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역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군산시는 지난달 28일 ‘근대산업유산 예술창작벨트’ 개관식을 열었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말고도 옛 일본 제18은행, 무역회사였던 미즈상사, 미곡창고, 적산가옥 등 다섯 동을 보수해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모 사업에 선정돼 105억원을 투입했다. 건물 5개동과 그 주변 진포 해양테마공원, 근대역사박물관을 묶어 군산내항 일대를 근대문화벨트로 구축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던 군산의 옛도심은 문화·예술의 힘으로 시침이 돌기 시작했다.
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 등록문화재 372호)은 근대미술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나가사키18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쌀 반출과 토지 강제매입에 쓸 자금을 유통시키려 1914년 건립됐다. 2009년 문화재청이 이름을 일본 제18은행으로 바꿨다.
일본 농장주들이 소유했던 창고시설은 쌀 수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시마타니농장의 창고는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가 쌀을 보관했던 창고였다. 미곡창고는 산뜻한 다목적 소극장으로 변신했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20일부터 토요일마다 상설 공연을 연다.
해방 이후 위락시설로 활용됐던 적산가옥은 장미갤러리로 바뀌었다. 1층은 문화예술 체험교육장으로, 2층은 지역 작가의 갤러리로 활용한다.
일제강점기 무역회사 미즈상사의 건물은 미즈카페로 복원됐다. 미즈상사는 식료품·잡화를 수입해 조선 사람들에게 팔았다. 1930년대 건립된 건물의 1층엔 카페테리아, 2층엔 북카페가 들어섰다. 다다미방 4개가 있는 2층 카페엔 근대시대 책·잡지·신문 등이 놓여 있고, 1930년대 군산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5개동 말고도 장미동에는 호남 관세전시관도 있다. 대한제국이 1908년 지은 이 건물은 지난날 군산세관 본관(전북도 기념물 87호)이었다. 군산항 수출입 화물에 관세를 물리던 현장이다. 서울에 있는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외벽은 적벽돌로, 지붕은 동판으로 얹었다. 그 주변 근대역사박물관은 2011년 9월 개관했다. 정준기 군산시 문화체육과장은 “무역항으로서 해상물류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라 할 근대 문화 자원을 살려냄으로써, ‘국제무역항 군산’의 면모를 상기하게 해주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근대산업유산 예술벨트’ 조성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 현장들
미술관·소극장 등으로 탈바꿈
예술가 창작 공간으로 활용도 “역사 교육 공간으로 자리매김”
“옛 모습에 무리한 덧칠” 우려도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벨트는 장미동에서 월명동으로 이어진다. 과거 월명동은 주로 부자 일본인이 살던 동네였다. 1980년대부터 나운동 등에 새도시가 개발되면서 낙후지역으로 전락했다. 군산의 원도심인 이 일대는 최근 근대역사문화를 테마로 한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일제강점기 건물을 단순히 복원·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군산지역의 문화·예술인들도 옛 도심의 변모에 상상력을 보태고 있다. 장미동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근처에 지난 3월 문을 연 ‘채움’은 예술인과 시민들이 만나는 문화공간이다. 건물주가 예술인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줬다. 1층은 전시장이고 2층은 작업실이다. 설치미술 작가 고보연(41)씨는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에게 미술 세계를 공유하고자 미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작은 공간들을 꽃피게 해 시민들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는 구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월명동 삼봉여인숙은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으로 탈바꿈했다. 50년쯤 숙박업소였는데 “이웃이 함께 뜻을 이루다”(여인숙·與隣熟)는 뜻을 담은 문화공간이 됐다. 군산 출신 화가 이상훈(42) ‘문화공동체 감’ 대표가 건물을 고쳐 2011년 문을 열었다. 1층은 전시공간, 2층은 숙소다. 이씨는 그해 주민들과 함께 마을 가꾸기 사업도 벌였다. 전봇대에 타일을 붙여 작품을 만들고, 낡은 벽을 청소해 그림을 그렸다. 이 사업으로 지난해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최우수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군산시는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 흔적이 있는 월명산의 동국사까지 750m를 역사탐방로로 조성할 예정이다.
근대문화유산을 되살려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나뉜다. 문동신 군산시장은 “군산시는 식민 지배의 가슴 아픈 기억을 미래 세대가 되돌아볼 수 있게 하고자 근대문화유산벨트 구축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한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교육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근대문화유산들에 ‘새로운 테크닉을 덧칠해’ 본래의 색채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의 큐레이터 서진옥(36)씨는 “옛 도심에 사는 노인들은 어쩌면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인물과 공간을 살려 군산만의 특징을 갖도록 하자. 유행을 따르지 않고 정형화한 틀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시민 백종준(49)씨는 “근대문화유산을 되살리면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큰돈을 쏟아붓기보다 콘텐츠를 풍부하게 갖추는 데도 힘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군산시 근대문화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군산시는 지난달 24일 근대건축관 근처에 자전거 15대를 뒀다. 3시간에 1000원이다. 배낭을 짊어진 탐방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근대문화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곧잘 눈에 띄었다. 자전거를 타고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 젊은이들에게 군산의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군산/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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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 근대건축관
② 옛 일본제18은행 → 근대미술관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 현장들
미술관·소극장 등으로 탈바꿈
예술가 창작 공간으로 활용도 “역사 교육 공간으로 자리매김”
“옛 모습에 무리한 덧칠” 우려도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벨트는 장미동에서 월명동으로 이어진다. 과거 월명동은 주로 부자 일본인이 살던 동네였다. 1980년대부터 나운동 등에 새도시가 개발되면서 낙후지역으로 전락했다. 군산의 원도심인 이 일대는 최근 근대역사문화를 테마로 한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일제강점기 건물을 단순히 복원·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③ 옛 미곡창고 → 장미공연장
④ 삼봉여인숙 →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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