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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어제아래와 그모레 / 권혁철

등록 2013-07-16 18:33수정 2013-07-16 22:20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국립국어원이 ‘2013 전국 사투리 상품 아이디어 공모전’ 접수를 다음달 5일부터 9월6일까지 한다고 한다. 사투리의 경제적 활용 가능성을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사투리를 활성화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행사다. 사투리가 돈이 되나 싶다가, 지난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삼진 당하면 궁디를 쥐 차쁜다’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삼진을 당하면 엉덩이를 걷어차 버린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글씨로 새긴 야구 모자는 상품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사투리는 문화 콘텐츠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투리는 천덕꾸러기 신세고, 표준말의 하위개념이다. 경상도 출신인 나는 그제, 어제, 오늘, 내일, 모레, 글피를 순서대로 빠르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제’와 ‘글피’의 뜻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제는 ‘어제의 전날’이고 글피는 ‘모레의 다음날’이란 뜻은 안다.

하지만 그제나 글피란 말을 들으면 뜻이 바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대뇌피질에서 ‘어제의 전날’, ‘모레의 다음날’이란 정보를 시차를 두고 끄집어내야 한다. 나는 기사에서 그제나 글피란 단어를 사용할 경우 국어사전에서 뜻과 용례를 확인해보곤 한다. 나에게 그제와 글피는 편안한 입말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쓰는 글말이다. 내가 그제와 글피가 낯선 것은 표준말인 이 말을 어릴 때 배우거나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19년가량 살았던 부산과 울산에서는 그제 대신 ‘어제아래’를, 글피 대신 ‘그모레’를 썼다.

나는 대학 졸업 뒤 서울에서 20년가량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투리에서 시나브로 멀어져갔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회나 명절 때 고향 갈 때를 빼면 온종일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다. 기자 일을 하면서 여러 지역 출신을 만나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표나게 쓰면 곤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고향인 울산에 갈 때마다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울산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중고등학생들이 표준말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곤 한다. 한번은 매끈한 표준말을 구사하는 학생들에게 “니들은 와 사투리 안 쓰노” 하고 물어봤더니 “투박하고 촌스러워서 싫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부산이나 울산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자녀들에게 서울말을 쓰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꽤 된다고 한다. 젊은 부모들 사이에선 어린아이가 표준말을 익힐 수 있게 서울말을 쓰는 육아 도우미가 인기라고 한다. 취업 준비생들은 면접에 대비해 ‘사투리 교정 학원’도 다닌다고 한다.

왜 자기가 나고 자란 곳에서 익힌 말 대신 서울말을 힘들게 배우려는 걸까. 단순히 사투리가 촌스럽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앙(서울)-지방(시골)이란 이분법적 사고와 현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지역 분권이 화두다. 지역 분권이 뿌리내리려면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도 뒷받침돼야 한다. 제주도는 2007년 9월 ‘제주어 보전 및 육성조례’를 만들었다. 지역어(사투리)가 지역 분권의 밑절미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0년 12월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아주 심각한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로 규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언어학자 겸 인류학자 니컬러스 에번스는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방대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사투리가 ‘언어 권리’란 주장에 동의한다. “인간에게 자명한 언어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될 권리, 자신이 선택한 언어를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차윤정 부산대 교수) 말이다. 사투리는 버리거나 숨겨야 할 게 아니라 문화자산이고 권리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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