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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집념…‘여대생 성폭행범’ 15년 만에 잡았다

등록 2013-09-05 19:57수정 2013-09-06 16:02

당시 경찰은 교통사고사로 처리
3년 전 결정적 물증 발견하고도
유족 고소 뒤에야 재수사 나서
공범 스리랑카인 2명 검거에 총력
“그만하고 빨리 갑시다.”

1998년 10월17일 아침 세수를 하고 있던 정아무개(65)씨에게 상기된 얼굴을 한 아내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우리 딸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느낌이 이상했지만, 아내가 가르쳐주는대로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들어가려는데, 미리 도착해있던 아들이 정씨를 붙잡았다. “아빠, 거기가 아니고 영안실이야.” 정씨는 영안실로 달려갔다.

배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던 딸(당시 18·대학 1학년)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해 예뻤던 딸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경찰관은 정씨에게 “따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날 새벽 5시30분께 대구시 달서구 월암동 구마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가로지르다가 최아무개(당시 52)씨가 몰던 23t 트럭에 치여 숨졌다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딸은 전날 학교 축제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날 오후 사고 현장에서 정씨는 딸의 속옷을 발견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영안실로 다시 달려갔다. 딸의 주검을 살펴봤다. 속옷이 하나도 없었다. 주검에서는 성폭행 흔적도 발견됐다. 사실을 담당 경찰관에게 말했다. 돌아오는 말은 “따님게 아니라 어떤 아주머니 속옷 아니냐”였다. 이후에도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그럼 교통사고가 아닌 것을 증명해봐라”고 했다. 사건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됐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었지만, 딸의 속옷에서는 신원불상의 디엔에이(DNA)가 나왔다. 하지만 경찰은 아버지 정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진실을 밝히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딸이 사고가 난 전날 밤 대구지하철 2호선 성서산업단지역 근처에서 대학 동기와 놀다 마지막으로 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딸이 사고를 당한 곳은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2㎞나 떨어져있는 외딴 곳이었다. 집에서 직선거리로 7㎞나 됐다. 딸이 그시간에 그 곳에 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정씨는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힘든 싸움이 시작됐다. 담당 경찰관을 직무유기로 고소했고, 트럭운전기사를 의심해 강간살인 혐의로 여러번 고소하기도 했다. 모두 각하나 혐의없음 처분이 났다. 사건은 제자리를 멤돌았고, 고통스런 시간만 이어졌다. 당시 <한겨레> 등 일부 언론에서는 정양이 성폭행 당하고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2010년 대구지검 서부지청이 성범죄를 저지른 스리랑카인 ㄱ(46)씨를 기소하며 해결의 실마리가 생겼다. 당시 검찰은 성범죄를 저지른 ㄱ씨의 디엔에이(DNA)를 채취해 보관했다. 이후 지난해 9월 대검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서로 보관중인 디엔에이를 대조하는 과정에서, ㄱ씨의 디엔에이가 1998년 정양의 속옷에서 나온 디엔에이와 일치하는 것이 발견됐다. 정양이 ㄱ씨에게 성폭행당했다는 물증이었지만, 검찰과 경찰은 바로 재수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5월 정양의 유족이 대구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하고서야 재수사가 시작됐다. 대구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된 디엔에이 검사를 통해 ㄱ씨의 디엔에이와 정양 속옷에서 나온 디엔에이가 일치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검찰은 정양 부검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당시 교통사고 상황을 재검토했다. 오래된 사건이었지만 탐문수사도 했다. 결국 검찰은 ㄱ씨 등 스리랑카인 3명이 정양을 고속도로 근처로 끌고 가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지난달 16일 정양을 성폭행하고 돈을 빼앗은 혐의(특수강도강간 등)로 ㄱ씨를 구속했다. 스리랑카에 체류중인 공범 ㄴ씨(44)와 ㄷ씨(39)에게는 기소중지를 내렸다.

용의자 ㄱ씨는 사건 당시 사건이 일어난 근처 성서산업단지 안 공장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ㄱ씨는 사건이 있던 그날밤 ㄴ씨, ㄷ씨와 대구시 달서구 갈산네거리 근처에서 정양을 자전거에 태워 2㎞를 끌고가 성폭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ㄱ씨는 당시 범행을 저지르고도 다음날 태연히 출근해 다른 노동자들에게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금로 대구지검 1차장검사는 “성폭행 이후 정양이 어떻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혼자 도움을 청하기위해 막연히 고속도로를 걸어가다가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체류자격을 얻어 국내에 살고 있었다. 이번 검찰 조사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졌지만, ㄱ씨는 이외에도 지난달 20살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추행한 혐의가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대구 달성경찰서에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은 2년전 지병으로 숨졌고, 간부들은 모두 퇴직한 상태다.

아버지 정씨는 “지금와서 밝혀졌다고 내가 뭔말을 할 수 있겠냐. 마음이 멍하고 허전할 뿐이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낡은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정씨는 현재 아파트 경비일을 하고 있다. 아내는 병원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정씨는 마지막으로 <한겨레>에 이런 말을 남겼다.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고 사건 담당 경찰관도 죽었는데 이제와서 누구에게 뭘 따지겠습까?”

대구/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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