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법으로 토종닭을 키우는 농부 시인 홍일선씨가 7일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남한강가 자신의 농장에서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현장 쏙] 여주 늘향골 ‘생명 농업의 힘’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 속에, 시를 쓰러 남한강 옆 마을에 귀농했다가 닭을 기르는 농부 시인의 농장을 찾았다.
숲에 놓아기르고 난방도 하지 않는 ‘자연농법’을 적용하는 이곳 닭들은 튼튼해 보였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 속에, 시를 쓰러 남한강 옆 마을에 귀농했다가 닭을 기르는 농부 시인의 농장을 찾았다.
숲에 놓아기르고 난방도 하지 않는 ‘자연농법’을 적용하는 이곳 닭들은 튼튼해 보였다.
‘닭 키우는 농부 시인’ 홍일선씨(오른쪽 다섯째)가 5일 오후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도리 마을 논두렁에서 시를 나눠준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
쌀겨 등 12가지 밥 주며 방목
생명 존중 뜻 담아 ‘닭님’ 불러
질병없이 7백여마리 ‘꼬끼오∼’
4대강 공사로 소음 시달린 닭
사라졌다가 조용해지자 돌아와
강한 생명력에 감탄해 눈물 나
그러나 2008년, 홍 시인과 닭들의 작은 평화는 무참히 깨졌다. 농가 바로 앞 남한강 곳곳을 파헤치는 거대한 삽질 ‘4대강 사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중순, 4대강 사업의 폐악을 비통해하며 <한겨레>에 ‘우리 이제 강물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라는 시를 싣기도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된 공사는 엄청난 소음을 일으켰고 사람이든 닭이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소음에 시달린 닭들은 알조차 낳지 못했다. 닭들은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여기는 이제 누구의 안식처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짐을 꾸리려던 무렵, 공사 소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그런 어느 날 사라졌던 닭들이 숲에서 노란 병아리 떼를 이끌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고통을 참지 못해 함께 살던 생명을 외면하고 도피할 생각마저 할 즈음,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 낳고 기르면서 고통을 이겨낸 닭들에게 부끄럽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때 홍 시인은 생명의 경이로움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닭에게 ‘님’이라는 존칭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생명농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고 이는 곧 자연농법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 홍 시인의 농장에선 닭 700여마리가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 확산을 막는다며 닭이나 오리를 마구 살처분하는 모습에 비통해했다. “비좁은 환경에서 집단·대량사육하는 시스템을 재검토해야지, 살처분을 능사처럼 여겨선 안 됩니다.” 홍 시인은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같은 동물 전염병은 인간의 속도전과 대량생산 욕망에서 생긴 것이라고 압축했다.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버무려진 사료를 먹이고, 전깃불을 내내 켜놓는 지옥 같은 곳에서 밀집사육하는데, 저항력이 생길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생명농업, 자연농법은 ‘소비자가 생산자의 생업을 보전하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숭고한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자연농법으로도 수지를 맞출 수 있을까? 닭 700여마리가 하루 알을 80~130여개 낳고 주문한 사람들에게 1개에 1000원씩 택배로 파는데, 너끈히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했다. 생명농업이 꽃피우는 늘향골은 2006년부터 녹색체험마을로 사랑받고 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바보 같은 숲’과 유유히 흐르며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는 ‘느림보 강’을 보며 자연을 느끼고 함께하자는 취지였다. 해마다 7000여명이 휴식하러, 체험교육도 하러 이곳을 다녀간다. 여기서 나아가 늘향골 주민들은 더 자연 속으로 들어가려 애쓴다. 50여가구가 사는 늘향골 녹색체험마을의 정성범(43) 사무장은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생명농업이나 자연농법 같은 개념을 걸고 농사짓지는 않는다. 주민들의 삶 자체가 자연을 닮아, 집집마다 시를 담은 문패 달기를 했다”고 말했다. 홍 시인에게 부탁해 시를 받아, 대문 문패에 새겼다. 지난해 말 늘향골 집집마다 7~8행 시가 담긴 문패가 내걸렸다. 아련한 옛 농촌의 자연 풍경과 그 시대를 살아온 농심을 짤막하게 그려낸 시들이다. ‘늙은 아카시아 나무껍질/ 쩌억적 갈라진 투박한 저 손/ 그러나 아름다운 저 손/ 이 나라 착한 농부들/ 미더운 인감도장이리라/ 더는 아플 수가 없어서/ 더는 아플 시간이 없어서/ 바람에 휘청이는 오월 보리밭이/ 그래도 종종 그립다는/ 구십 청년 농부여.’ 생명, 농사, 농부의 삶을 담은 시들은 <도리 농부>란 시집으로 엮이고 있다. 이 마을 이경희(57) 이장은 “주민 100여명이 사는 이곳은 예전엔 조선시대 명성황후 등을 배출한 여흥 민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다른 성씨가 어우러져 녹색과 생명을 주제로 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여주/글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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