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17년 전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아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아들이 3살이 됐다. 유치원에 보낼까 고민하다 공동육아를 선택했다.
당시 나는 공동육아가 아들에게 최상의 교육환경이라고 믿었다. 공동육아는 자연과 공동체 속에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겠다는 교육철학에 터잡고 있다. 공동육아에서는 아이들에게 한글 공부, 숫자 공부, 영어 공부 같은 선행학습(인지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실컷 놀기만 한 아들은 한글을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선생님이 다음날 준비물 등을 칠판에 적어 놓으면 아이들이 알림장에 써야 했다. 아들은 한글을 쓸 줄 몰라 준비물을 챙길 수 없었다. 아내가 아침마다 같은 반 친구 집에 전화해 준비물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도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학원을 다니지 않고 열심히 놀았다. 그런데 5학년이 되니 아들이 같이 놀 친구가 없어졌다. 동네 친구나 학교 친구 모두 학원에 모여 있었다. 아들은 함께 놀 친구를 찾아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학원에 갔다.
나는 아들의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에서 현실의 벽을 실감했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아들 성적표에 웬만하면 ‘잘함’이란 정성적 평가를 적어줬다. 그런데 중학교부터는 시험 석차를 매기는 정량적 평가가 나왔다.
아들의 첫 중간고사 성적을 놓고 나는 속이 터졌다. 하지만 아들은 “성적으로 줄서면 내 앞에 있는 애들보다 내 뒤에 있는 애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들은 “학원을 끊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아들이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겠다고 판단했다.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아들은 북한도 무서워서 남침을 못한다는 중2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로 아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은 실패했다. 이후 자기주도적 학습은 자제력과 영민함을 두루 갖춘 극소수 학생에게나 통할 이야기라고 나는 믿게 됐다.
지난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들은 학원을 남들처럼 다니고 선행학습도 한다. 아들 학원비 부담이 만만찮다. 학원의 학습 효과도 쉬 믿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학원을 그만두게 할 수도 없다. 이미 아들은 학원을 기반으로 공부의 틀이 짜였기 때문이다. 나는 1980년 과외금지 조처처럼 정부가 사교육을 규제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선행학습을 법으로 금지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반가우면서도 불가능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 ‘선행학습금지법’이 통과됐다. 나는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법으로 선행학습을 막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을 지켰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는 선행학습금지법의 내용을 보고 ‘이런 허술한 내용에 어떻게 선행학습금지법이란 이름을 붙였느냐’는 놀라움이었다.
선행학습금지법은 공교육만 규제한다. 사교육에 대해서는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광고를 막는 게 전부다. 선행학습금지법을 두고 수험생이 모이는 누리집에서는 ‘웃기는 이야기’란 반응이 대세다. 선행학습은 입시 경쟁에서 이기려는 학부모와 학생의 욕망에서 비롯됐다. 눈앞에 보이는 선행학습만 막아 풀리지 않는 문제다. 특정 몇몇 대학을 나오면 먹고사는 길이 넓어지는 현실이 근본문제다.
누구나 학벌사회의 폐해를 알고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자식은 학벌사회 상층부에 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부터가 그렇다. 아이가 어릴 때는 대안교육을 고민하다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사교육에 투항해버렸다. 박근혜 정부만 욕해선 해법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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