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뉴질랜드 오클랜드시에 있는 카지노장의 고객 등급은 다섯 단계로 나뉜다. 카지노로 잃은 돈 액수가 많아야 브이아이피 대접을 받는다. 일당 5억원짜리 ‘황제노역’을 살았던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도 카지노 최고 고객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졌다. 400억원대의 벌금 및 세금을 내지 않고 슬그머니 뉴질랜드로 떠난 허 전 회장은 요트와 카지노 도박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카지노 도박 장면이 포착된 사진 한 장이면 허 전 회장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 전 회장의 도박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한 이는 뉴질랜드 동포 ㄱ씨이다. <한겨레>가 허 전 회장의 카지노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한 뒤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도 허 전 회장이 테이블 도박을 하는 모습이 포착된 사진을 보고 “욱하는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을 정도다. 호화 요트를 타고 고급 아파트에 사는 것은 범법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벌금 수배자가 외국에서 카지노 도박을 즐긴 것은 금액에 따라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벌금 미납자는 범죄인 인도 대상이 아니다”라던 검찰은 이후 허 전 회장 쪽에 귀국하라며 압박 수위를 높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허 전 회장의 두 딸 아파트에서 그림과 골동품을 압류한 것은 ‘최후통첩’이었다.
허 전 회장 쪽 인사들이 현지에서 아파트 분양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제보한 이도 동포 ㄴ씨이다. 그의 도움으로 뉴질랜드 정부의 비즈니스혁신고용부의 누리집을 뒤져 허 전 회장과 가족, 측근들이 소유하고 있는 7개 업체의 명단을 찾을 수 있었다. 동포 ㄷ씨는 허 전 회장이 새로 구입한 2층짜리 초호화 요트를 운행할 선장 모집 공고를 낸 적이 있다고 알려왔다. 또 다른 동포는 호화생활을 즐기는 허 전 회장이 정작 동포 사회에 대한 기부에는 인색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사실 허 전 회장이 4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은 뉴질랜드 동포 사회의 수많은 ‘시민검사’들이 활약했기에 가능했다.
허 전 회장의 황제노역이 시작되면서 지역법관(향판)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를 상정해 책정한 노역형 하루 일당을 5억원으로 상향 조정한 항소심 재판부는 원성의 대상이 됐다. 당시 항소심 재판장은 대주그룹 계열사와 부적절한 부동산 거래를 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결국 옷을 벗었다. 지역 토호들과 지역법관, 지역법관 출신 변호사들의 암묵적 카르텔도 눈총을 샀다.
하지만 황제노역 파문의 중심엔 검찰의 ‘원죄’가 똬리를 틀고 있다. 검찰이 허 전 회장에 대해 칼을 빼든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검찰은 2007년 11월 508억원의 세금을 포탈하고 10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허 전 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런데 검찰의 태도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확연하게 바뀌었다. 검찰은 2008년 9월 허 전 회장에게 징역형을 구형하면서 벌금 1000억원을 선고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동일 사안에 대해 검찰의 입장이 180도 달라진 것은 정치 지형이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지금 검찰은 과거 사건을 ‘설거지’하는 처지여서 수사에 신명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변찬우 광주지검장은 최근 “허 전 회장 측이 벌금을 내면 끝나는 것 아니냐”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하지만 국민들은 검찰이 국내외에 불법적으로 숨겨놓은 허 전 회장 쪽의 재산을 낱낱이 파악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엄중하게 형사처벌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뉴질랜드 동포 ‘시민검사’들은 대한민국 검찰의 ‘허재호 사건’ 수사 과정을 꼼꼼하게 주시하고 있다. 이번 수사는 검찰의 원죄를 씻어낼 기회이기도 하다.
정대하 사회2부 호남제주팀장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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