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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뱀 같은 지혜 / 권혁철

등록 2014-09-09 18:44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집에 있는 아이들한테 어떤 게 좋은지 얘기해보라.”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지난달 28일 9시 등교 찬반 논란과 관련해 학부모들에게 한 말이다. 경기도민인 나는 이재정 교육감의 이 말이 떠올라, 며칠 전 고등학교 2학년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에게 9시 등교에 대해 물어봤다.

“아빠, 교육감님 알아요?” 아들은 대뜸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 아빠가 전해 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아들은 9월부터 시작된 9시 등교에 대해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부터 털어놓았다. 9시 등교는 이재정 교육감이 “공교육 정상화의 출발”이라고 밝힌 역점사업이다. 9월 중 실시 예정인 학교까지 포함해 경기도 전체 2550개 학교 가운데 94.6%(2107곳)가 9시 등교에 참여하고 있다.

아들은 자기 반 3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봤더니 3명만 9시 등교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9시 등교에 찬성하는 쪽이다. “학생들이 그동안 입시에 시달리며 아침 수면시간을 뺏기고 아침을 굶고 등교하며 과도한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환경을 개선하는 획기적인 조치”(9시 등교에 대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 논평)란 주장에 원칙적으로 공감한다.

아들의 반대 논리는 분명했다. 아침에 늦게 학교에 오더라도 오후에 그만큼 늦게 끝나기 때문에 9시 등교는 결국 조삼모사라는 것이다. 과중한 학습부담은 등교시간 조절만으로 해결될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주장이었다. 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기도교육청이 교육부와 협의해 과도한 수업시수를 개선하는 데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9시 등교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일방적인 시행 과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아들한테서 8월29일 ‘9시 등교 실시 안내’란 가정통신문을 받았다. 9시 등교를 9월부터 하니 적극적인 이해와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누리집에 들어가보니 8월26일 ‘9시 등교에 관한 학부모 설문조사’를 한다는 공지사항만 올라와 있었다. 이 설문조사에 학부모가 얼마나 참여했고 결과는 어땠는지는 지금도 나는 모른다.

그나마 설문조사 시늉이라도 낸 아들의 학교는 나은 편이다. 딸이 다니는 중학교는 사전 안내도 없이 9시 등교를 이달부터 시작했다. 딸에게 “9시 등교는 어떻게 결정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교장 선생님이 결정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 주변에서 9시 등교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폭넓은 의견수렴과 정책 조정 과정이 빠진 데 대해서는 모두 비판적이다. 이재정 교육감이 강조한 대로 9시 등교가 “공교육 정상화의 출발”이 되려면 학부모나 학생, 교사 등 교육주체와 충분히 협의하고 단위 학교의 의견을 수렴했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9시 등교는 그 흔한 공청회 한 번 없이 마치 군사작전처럼 전격적으로 실시됐다.

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를 택하여 둘씩 짝지어 전도를 보내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여라”라고 나와 있다. 성공회 신부 출신인 이재정 교육감 앞에서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지만, 이리만큼이나 험악한 교육 현안들을 풀려면 비둘기의 순결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교육감에게는 뱀 같은 지혜도 필요하다. 선한 의도와 순수한 열정만으로 좋은 정책 효과를 거뒀는지 이 교육감이 통일부 장관으로 일했던 참여정부 경험을 돌아봤으면 한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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