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삼척 원전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열린 9일 오후 삼척시 교동 제3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 뒤 투표용지를 받고 있다. 삼척/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강원도 삼척 원전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열린 9일 오후 삼척시 교동 제3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 뒤 투표용지를 받고 있다. 삼척/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역 쏙] 삼척 주민들이 몰고온 전국 ‘탈핵’ 바람
강원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삼척 시민 84.9%가 반대표를 던졌다. 삼척과 함께 새 원전 건설 예정지로 지정된 경북 영덕에서도 주민투표 바람이 불고 있다.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를 주민 스스로 결정하는 게 지방자치 아닐까?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 유치는 주민들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9일 밤 11시,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강원도 삼척체육관은 초겨울처럼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 승리’, ‘원전 반대’, ‘주민 주권’, ‘민주주의’ 등의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시민들이 직접 주민투표위원회를 꾸려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삼척 시민 84.9%가 ‘원전 유치 반대’를 선택했다.
삼척 시내 중심가 도로도 ‘주민투표로 원전 찬반 갈등에 종지부를 찍자’, ‘정부는 각성하라. 원전 백지화를 촉구한다’ 등의 내용이 적힌 펼침막이 뒤덮다시피 했다.
삼척 주민투표 압도적 반대 85%
1982년에도 후보지 지정됐으나
16년 투쟁으로 막은 역사 재현
‘효력 부정’땐 ‘제2부안사태’ 우려 “송이·대게 청정지역 지켜내자”
영덕군의회 투표안 통과시킬듯
기장·울주·영광 등 유치 단체장도
뒤늦게 정부 제동걸기 나서 부산, 시장에 ‘재연장 저지’ 압박
‘증설 승인’ 대전시장은 사면초가 ■ “우린 원전 안해”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는 원전 건설과 관련해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묻기 위해 실시된 국내 첫 주민투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원전 건설 과정을 보면,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회의 동의를 받아 원전을 운영하는 공공기관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 원전 유치 신청을 하면 한수원이 후보지를 선정해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직접 묻는 과정은 없다. 이광우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기획홍보실장은 “2010년 삼척시는 많은 주민들이 찬성하고 있다는 식으로 포장하기 위해 96.9%의 주민이 찬성하고 있다는 날조된 서명부를 제출했고, 한수원은 이를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
주민 여론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원전 건설은 지역 분열로 이어졌다. 삼척에선 원전 반대 주민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원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삼척시·찬핵단체 등과의 갈등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2012년 10월에는 원전 유치를 강행한 당시 삼척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까지 실시됐지만, 주민투표법이 정한 개표요건 투표율 33.3% 미달로 투표함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4년간 표출되지 않았던 삼척 민심이 지난 6·4 지방선거와 주민투표로 분출되면서 삼척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선 애초 예상을 깨고 ‘반핵’을 대표 구호로 내세운 김양호 시장이 압승했다. 그는 62.44%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번 주민투표에선 삼척 시민들이 지난 선거 때보다 높은 ‘84.9%’란 원전 유치 반대표를 던져 ‘반핵’ 의지를 분명하게 표출했다.
삼척시는 원전 유치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뜻이 확인된 만큼 이를 근거로 원전 예정구역 지정 고시를 해제하라고 정부에 요구할 참이다. 이번 주민투표에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주민 수용성’을 우선시한다고 내세워온 정부로선 압도적인 반핵 여론을 무시하고 원전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부담이다.
삼척 시민들은 앞서 1982년에도 원전 후보지로 지정됐지만, 16년 동안 투쟁을 벌여 1998년 원전 후보지 해제를 이끌어낸 바 있다. 김승호 삼척원전백지화 범시민연대 상임대표는 “정부에서 억만금의 지원을 한다고 해도 원전은 절대 반대한다.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스스로 원전을 반대한다는 뜻을 민주적인 주민투표 절차를 통해 표현한 만큼 정부가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 “우리도 투표하자”
삼척과 함께 새 원전 건설 예정지로 지정된 경북 영덕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삼척에 견줘 원전 반대 움직임이 적었던 ‘조용한 도시’ 영덕에도 주민투표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가장 적극적이다. 한국농업경영인 영덕군연합회는 이미 지난달 26일 영덕군의회에 새 원전 건설에 대해 주민투표를 통해 여론을 수렴하자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권순관 한국농업경영인 영덕군연합회장은 “영덕군은 송이와 대게가 특산물인데 원전이 들어서면 판매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와 공청회, 주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척발 주민투표’ 바람에 그동안 꿈쩍 않던 영덕군의회도 주민 여론을 살피고 있다. 특위를 구성해 본회의에서 이 안건을 정식으로 다루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새누리당 6명에 무소속 1명으로 여당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원전 문제만큼은 ‘원전 반대’로 의견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이강석 영덕군의회 의장은 “영덕은 시골이 아니다. 포항에 있는 포스코와도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주말만 되면 대게 등을 먹으러 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주민들도 절반 이상은 원전 건설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주민들이 뽑아준 의회인 만큼 주민들의 뜻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혜령 영덕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 투쟁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삼척 주민투표 움직임 등의 영향으로 원전을 통한 이익보다 청정 지역을 유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다는 쪽으로 주민 여론이 변한 것 같다. 영덕군과 군의회가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영덕군의회가 나서 주민투표 동의안을 통과시킬 가능성도 있다. 군의회에서 통과되더라도 ‘원전 건설은 국가사무로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제동을 걸 가능성이 크다.
■ “주민 안전 뒷전 단체장 우린 반댈세”
고리원전 1호기 수명 재연장 문제가 이슈인 부산에선 서병수 부산시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리원전 1호기 수명 재연장 저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서 시장이 지난달 11일 열린 부산시·새누리당 당정협의회에서 시민들의 여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등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수영 반핵부산시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서 시장이 취임 100일이나 지났지만, 자신이 공약했던 고리원전 1호기 수명 재연장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이나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민 안전을 뒷전으로 하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태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한전원자력연료 제3공장 증설 등 핵시설 밀집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밝혔던 권선택 대전시장도 사면초가 위기에 몰렸다. 대전시가 주민과 환경단체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전원자력연료 제3공장 증설 실시계획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유성핵안전주민모임과 대전환경운동연합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권선택 대전시장이 주민들 뒤통수치기 행정을 보여줬다”며 대전시와 권 시장을 비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내세워 원전을 유치한 지방자치단체들은 뒤늦게 일방적인 정부의 원전 정책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산시 기장군, 울산시 울주군, 경북 경주시·울진군, 전남 영광군이 참여하고 있는 ‘원전소재 자치단체 행정협의회’는 오는 15일 단체장들이 모여 원자력 안전 최고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원전 지역 기초단체장이 당연직 위원이 되도록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수희 에너지정의행동 부산지역 상임활동가는 “원전 사고가 자주 일어나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는데도 정작 원전을 두고 있는 자치단체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이 있는 기장군 등 기초지자체에서 광역지자체 단위로 문제의식이 확대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원전 건설 앞서 꼭 투표합시다”
정부가 민간 주도로 치러진 삼척 주민투표에 대해 ‘법률적 효력이 없다’고 부정하면서 원전 취소를 요구하는 주민과 정부 간 갈등이 확대되면 ‘제2의 부안 방폐장 사태’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원전 건설에 따른 주민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대안으로 시민사회 진영뿐 아니라 국회에서도 원전 건설에 앞서 주민들의 의사를 직접 묻는 주민투표를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이이재 새누리당 의원(동해·삼척)은 최근 원전을 건설할 때 지방자치단체가 유치 신청 과정에서 반드시 주민투표를 통해 지역 주민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하는 것을 뼈대로 한 ‘전원개발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의원은 “원전 안전 문제는 안심이 되느냐, 불안하냐 등의 주민들의 주관적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해결하려면 주민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주민 뜻을 확인하려면 주민투표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
삼척/박수혁 기자, 전국종합 psh@hani.co.kr
1982년에도 후보지 지정됐으나
16년 투쟁으로 막은 역사 재현
‘효력 부정’땐 ‘제2부안사태’ 우려 “송이·대게 청정지역 지켜내자”
영덕군의회 투표안 통과시킬듯
기장·울주·영광 등 유치 단체장도
뒤늦게 정부 제동걸기 나서 부산, 시장에 ‘재연장 저지’ 압박
‘증설 승인’ 대전시장은 사면초가 ■ “우린 원전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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