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촌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평창 ‘계촌별빛오케스트라’
지난 7월30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백덕산(해발 1350m) 자락의 한 산골 초등학교. 한산한 운동장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니 ‘삐거덕삐거덕’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바닥 복도 위를 까맣게 그을린 학생들이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마다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크고 작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었다. 선생님이 다가와 ‘파트 연습 준비’라고 외치자 학생들은 순식간에 교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뒤 가까운 교실에서 영화 <올드보이>의 주제곡 ‘더 라스트 왈츠’가 흘러나왔다. 복도로 난 교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조금 전 복도를 뛰어다니던 한 학생이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콘트라베이스를 품에 꼭 끌어안고 활을 켜고 있었다. 조금 전 복도에서 본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사뭇 진지하다.
옆 교실로 눈을 돌리니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저마다 바이올린을 하나씩 턱과 어깨 사이에 낀 채 드라마 <하얀 거탑>의 삽입곡 ‘비 로제트’를 능숙하게 연주했다.
이들 뒷줄에선 1학년 남학생 3명이 손에는 바이올린을 꼭 쥔 채 웅장한 선율에 몸을 맡기고 누나와 형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까까머리를 한 박건우군은 “아직은 ‘비행기’나 ‘나비야’, 생일축하 노래밖에 연주하지 못하지만 빨리 형들처럼 멋진 곡도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계촌초등학교 전교생 44명이 참여하고 있는 ‘계촌별빛오케스트라’의 방학 중 연습 풍경이다.
■ 전교생 오케스트라 탄생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 살고 있는 주민은 1000여명. 해발 700m의 산악분지로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도시에서는 흔한 학원이나 피시방, 분식집 등도 없다.
이런 산골 학교에 계촌별빛오케스트라가 꾸려진 것은 2009년 3월. 당시 강릉시교향악단 창단 멤버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권오이 교장과 강원리코더교육연구회 회장인 이경우 교사가 음악을 통한 특색교육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빠듯한 학교 예산으로 악기를 하나둘씩 구입하고 교사들이 직접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악기 한번 접해보지 못한 산골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고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해 보였다. 학부모들도 “학교에서 애들을 ‘딴따라’로 만들려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처음부터 모든 걸 하나씩 배워야 하는 학생들도 진땀을 흘려야 했다.
곱지 않은 시선 속에 그해 7월 창단연주회가 열렸고, 예상을 깬 학생들의 연주 실력에 학부모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박수와 호응이 쏟아졌다. 첫 무대에 오른 학생들도 ‘해냈다’는 자신감 속에 즐거운 환호를 터뜨렸다.
계촌초 전교생 44명 모두 참여
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방학중에도 학교 나와 맹연습 창단 7년차 어느덧 ‘평창의 명물’
송년음악회 등 연 10여차례 공연 평창유치실사단 왔을 때도 연주
이젠 평창올림픽 개막식 서는 꿈 꿔
3월부터 한예종서 직접 나와 지도
오케스트라를 만든 권오이 강릉 초당초 교장(전 계촌초 교장)은 “처음 계촌초에 부임해보니 학생들이 목표의식도 없고 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게임 하기 바빴다. 전교생이 오케스트라 활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자신감도 생기고 발표력도 좋아져 학생·학부모·교사 모두가 좋아했다”고 말했다.
■ 우리가 평창 대표 오케스트라
창단 7년차에 접어든 계촌별빛오케스트라는 이제 평창뿐 아니라 강원도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우뚝 섰다. 이제는 한국판 ‘엘 시스테마’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유명해졌다. 엘 시스테마는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한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계촌초등학교도 다른 지역 농어촌처럼 학생 4명 중 1명꼴로 한부모 혹은 조손 가정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일 정도로 형편이 넉넉지 않다. 하지만 음악시간만큼은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다. 월요일과 목요일 2시간씩 방과후수업 시간에 전문 강사의 지도를 받는다. 수요일 합주 연습도 모두 무상이다. 악기뿐 아니라 단복 등도 마찬가지다.
허동현 방과후담당 부장교사는 “2010년 교육부 학생오케스트라 운영학교로 지정돼 예산을 지원받았고, 지금은 인근 분교와 통폐합되면서 받은 예산과 교육청 지원 등으로 음악교육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3학년 박지후군은 “경기 안산에서 2년 전에 전학 왔는데 처음엔 주변에 피시방과 분식점도 하나 없어 적응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수업이 끝난 뒤 공짜로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처음엔 마뜩잖은 눈길을 보내던 마을 주민들도 지금은 계촌별빛오케스트라 열혈팬으로 변신했다. 매년 7월과 12월에 열리는 ‘한여름밤의 음악회’와 ‘송년 음악회’는 마을 최고 잔치가 됐다. 마을에서 미용실을 하는 조미희(38)씨는 “오케스트라는 마을의 자랑이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내 나이가 어때서’ 등 익숙한 음악을 선보이면 너무 좋아하신다”고 귀띔했다.
한 해 평균 10차례 이상 무대에 오르는 등 활동도 왕성하다. 2013년부터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등 인근 병원을 직접 찾아가 환자들에게 음악을 선물하는 등 그동안 받은 도움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계촌초가 특색 있는 음악교육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부모들의 전학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오케스트라 창단 전에는 한 해 전입학생이 2~3명에 불과했지만, 오케스트라가 본격 운영된 2010년 6명, 2011년 7명, 2012년 6명, 2013년 7명, 2014년 9명 등 계촌초를 찾는 학생이 줄을 잇고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전학 온 6학년 신정민군은 “처음엔 바이올린을 하다 4학년 때부터 타악기인 팀파니를 맡고 있다. 지금은 드럼 연주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 꿈은 이루어진다
한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 정명화씨도 계촌별빛오케스트라의 활약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씨는 지난 7월10일부터 사흘간 열린 계촌클래식축제에 참석해 계촌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만나 직접 지도에 나서는 등 애정을 보였다.
계촌별빛오케스트라가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계촌마을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3월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연주자들이 서울과 평창을 오가며 지도하고 있다. 학생들은 운지법과 호흡법 등 악기에 대한 기본기부터 차곡차곡 다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겨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2017년까지 계속된다.
계촌별빛오케스트라가 2018 평창올림픽 주개최지인 평창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라는 점 외에도 평창겨울올림픽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2011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이 평창을 방문하던 날 열린 ‘2018 평창겨울올림픽 유치 기원 연주회’ 무대에 올라 고사리손으로 연주하며 올림픽 유치에 힘을 보탰다. 그해 7월 유치가 확정된 뒤에도 ‘평창 유치 성공 기념 음악회’에 참가해 기쁨을 함께 나눴다.
학생들의 개막식 공연에 대해 평창겨울올림픽조직위원회도 긍정적인 분위기다. 조직위 관계자는 “최근에야 개막식 총감독을 선임하는 등 백지상태다. 현재로선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학생들이 평창을 대표해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일 기량만 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4학년 홍주연양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이 중학교 입학하는 해인 2018년 2월9일 열린다. 무대에 오를 수 있다면 계촌초 별빛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6학년 이다경양도 “음악가가 꿈은 아니다. 즐겁기 때문에 계속하고 싶을 뿐이다. 모두 함께 2018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선다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고 말했다.
평창/글·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지난 7월30일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에 있는 계촌초등학교 전교생이 참여한 ‘계촌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 학교 교실과 다목적실 등에서 파트별로 모여 연습하고 있다. 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방학중에도 학교 나와 맹연습 창단 7년차 어느덧 ‘평창의 명물’
송년음악회 등 연 10여차례 공연 평창유치실사단 왔을 때도 연주
이젠 평창올림픽 개막식 서는 꿈 꿔
3월부터 한예종서 직접 나와 지도
지난 7월30일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에 있는 계촌초등학교 전교생이 참여한 ‘계촌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 학교 교실과 다목적실 등에서 파트별로 모여 연습하고 있다. 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지난 7월30일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에 있는 계촌초등학교 전교생이 참여한 ‘계촌별빛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 학교 교실과 다목적실 등에서 파트별로 모여 연습하고 있다. 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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