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전남 순천의 순천왜성 복원 전 모습. 순천시 제공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① 시리즈를 시작하며
“선조 25년(1592년) 4월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했다. 부산진을 함락시켰는데 첨사 정발이 전사하고, 동래부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도 전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나라를 공격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사 20만을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한 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등을 길잡이로 삼아 4만~5만척의 배로 13일 바다를 건너왔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편에는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의 시작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집중 축성
울산~순천 남해안에 31개 쌓아
전략요충지 ‘본성’ 주변 ‘지성’ 배치
한·일 축성교류의 역사유적 가치 치욕의 유적…97년 문화재 등급 낮춰
묘지·농경지 활용 등 사실상 방치
강제동원된 조상들 피땀 서린 곳
학계 등 보존·활용 방안 마련해야
1592년 음력 4월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곧바로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상해 5월3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으며, 6월14일 평양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 의병 봉기, 조선 수군의 활약 등으로 수세에 몰려, 다음해 4월 한양 이남으로 후퇴했다.
조선에 침략한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하면서 부산과 주변 지역에 성을 집중적으로 축성했다.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성을 추가로 축성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이 남해안에 쌓은 일본식 성을 왜성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왜성은 강이나 바다 근처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에 본성을 쌓고, 본성 근처에 방어를 돕는 요새 격인 지성을 배치했다.
왜성은 산꼭대기나 산허리를 깎아 가장 높은 곳에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워 주위에 본성곽을 구축하고,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겹겹이 두르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마을 중심부를 하나의 성곽으로만 둘러싼 조선의 읍성과는 다르다. 조선의 읍성은 한군데라도 성벽이 뚫리면 쏟아져 들어오는 적군을 막는 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만, 왜성을 점령하려면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한다. 방어하기에 좋은 구조로, 실제로 전쟁 동안 조·명 연합군에 점령된 왜성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울산부터 전남 순천까지 남해안에 왜성 31개가 축성됐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이다. 이 가운데 부산 박문구왜성과 경남 양산 호포왜성은 개발 바람에 휘말려 완전히 사라졌다. 부산 추목도왜성과 경남 진주 망진왜성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호포왜성과 경남 김해 마사·농소왜성 등 3개는 임진왜란기에 축성됐는지 아니면 정유재란기에 축성됐는지 불분명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 정부는 주요 왜성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했으나, 97년 왜성의 문화재 가치 등급을 지방기념물 또는 문화재자료로 낮췄다. 이후 왜성은 왜군이 지은 성이라는 인식과 우리 민족 치욕의 상징물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묘지나 농경지로 활용되는 곳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왜성의 존재 자체가 생소한 상황이다.
부산시 문화관광국 관계자는 “현재 시 지정 기념물로 분류된 왜성은 구포·죽성리·죽도왜성 등 3개인데, 지난해부터 예산을 확보해 정비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는 왜성을 한·일 축성 교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한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읍성은 백성을 보호하는 행정 목적의 성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읍성 축성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남한산성·수원화성 등 전쟁 이후 건설한 성의 성벽 각도는 예전 읍성처럼 수직이 아니라 왜성처럼 비스듬하다. 성벽 각도가 비스듬하면 수직보다 튼튼하며 방어하기에도 좋다.
일본의 축성 기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쟁 뒤 축성된 일본 성엔 조선 읍성처럼 성벽에 네모난 모양의 돌출 구조물이 들어섰다. 성벽의 돌출 구조물은 병사들이 성벽에 달라붙은 적들을 양쪽으로 협공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현재 일본엔 에도막부 시대 이전의 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학계는 우리나라의 왜성을 일본 성 축조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보고 있다.
또 전쟁 뒤 일본을 지배하게 된 에도막부 시대에 축성된 왜성 부근엔 행정 관청이 들어섰는데, 이는 수성과 전투원 보호 목적으로만 건설됐던 이전 왜성에 백성을 보호하는 행정 목적의 조선 읍성의 특징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읍성이 일본의 통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련 학계에선 왜성을 한·일 교류 역사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블랙박스’로 보고 있다.
역사적 교훈의 유적으로 왜성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왜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 사실상 유일한 실체적 흔적으로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적이다. 축성 과정에 왜군에 의해 강제동원됐을 우리 조상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든,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학계의 연구 상황은 기초적 수준이고, 정부나 지자체의 노력도 미미한 실정이다. 한-일 관계사 측면에서 왜성의 존재와 실태를 알리고 보존·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31개 전체 왜성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기사를 17일부터 10여차례에 걸쳐 매주 지역면(영남)과 인터넷 한겨레(hani.co.kr)에 싣는다.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다음 세대에 교훈 남기기 위한 문화자산”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왜성 존재마저 잊혀가 안타까워
어두운 역사 마주봐야 미래 대비
“왜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우리한테 남긴 어두운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왜성을 이민족 침략의 증거이자 교훈을 주는 유적으로 마주 바라봐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나동욱(52)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우리가 왜성이라는 아픈 역사를 외면한다면,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왜성을 있는 그대로라도 보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왜성 연구>를 쓰는 등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왜성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동아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박물관에서 근무하는 그는 현재 한국성곽학회 이사,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남 문화재위원, 부산시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우리 학계의 왜성 연구 현황은?
“우리나라의 왜성 연구는 1961년 한일문화연구소의 <경남의 왜성지>가 출간되면서부터 시작됐지만, 주목받진 못했다. 90년대부터 왜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해 최근에야 왜성 연구의 기본 자료들이 확보됐다. 여전히 기초적 연구 성과에 그치고 있다.” -왜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왜성의 경우엔 근처 주민들이 왜성이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왜성의 존재 자체가 잊혀가는 실정이다. 일제강점기 등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왜성의 보전 상황은?
“본성은 그나마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성의 방어를 돕는 지성의 대부분은 토목공사 등으로 멸실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연구가 쉽지 않다.” -왜성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흘러간다. 아픈 과거를 마주보고 반성과 성찰을 해야 자산으로 남는다. 왜성은 문화자산이다. 다음 세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존해야 한다.” 부산/글·사진 김영동 기자
울산~순천 남해안에 31개 쌓아
전략요충지 ‘본성’ 주변 ‘지성’ 배치
한·일 축성교류의 역사유적 가치 치욕의 유적…97년 문화재 등급 낮춰
묘지·농경지 활용 등 사실상 방치
강제동원된 조상들 피땀 서린 곳
학계 등 보존·활용 방안 마련해야
순천왜성은 왜군이 정유재란 때 쌓은 성으로 1998년 전남지방기념물 171호로 지정됐다. 순천시는 2013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김영동 기자
“다음 세대에 교훈 남기기 위한 문화자산”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왜성 존재마저 잊혀가 안타까워
어두운 역사 마주봐야 미래 대비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우리나라의 왜성 연구는 1961년 한일문화연구소의 <경남의 왜성지>가 출간되면서부터 시작됐지만, 주목받진 못했다. 90년대부터 왜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해 최근에야 왜성 연구의 기본 자료들이 확보됐다. 여전히 기초적 연구 성과에 그치고 있다.” -왜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왜성의 경우엔 근처 주민들이 왜성이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왜성의 존재 자체가 잊혀가는 실정이다. 일제강점기 등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왜성의 보전 상황은?
“본성은 그나마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성의 방어를 돕는 지성의 대부분은 토목공사 등으로 멸실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연구가 쉽지 않다.” -왜성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흘러간다. 아픈 과거를 마주보고 반성과 성찰을 해야 자산으로 남는다. 왜성은 문화자산이다. 다음 세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존해야 한다.” 부산/글·사진 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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