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생포 왜성 본곽 모습. 왼쪽 가운데 평평하게 솟아오른 곳이 이 성의 심장부인 천수대 터로,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머물던 3층 이상의 천수각 건물이 있던 곳이다. 이 곳 일대에서 유정과 가토의 서생포 회담이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문화재연구원 제공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⑤ 울산 울주군 서생리 서생포왜성
“고층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중략) 오래도록 주둔해 머물 계획인 것 같다.”(<송운대사분충서난록> 중)
임진왜란이 터진 지 꼬박 2년 지난 1594년 음력 4월13일 ‘사명당’이라는 법호로 널리 알려진 승병장(도총섭) 유정은 지금의 울산 울주군 서생면 711 일대 서생포 왜성 안에 처음 들어가 보고 느낀 것을 이같이 기록했다. 당시 유정은 왜군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회담을 위해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이 성을 찾았다. 이 성은 가토가 1년 전인 1593년 5월부터 조선 침략의 배후거점 확보를 위해 쌓아 주둔했던 곳이다.
유정은 이 성을 처음 보고 그 웅장하고 화려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가토의 숨은 야욕까지 간파했다. 그는 가토와 왜란 중 3차례 이 성에서 만나 회담했다. ‘호랑이 굴’과도 같은 이 곳에서 그는 적장 가토를 통해 명나라와 일본 사이 비밀리에 진행되던 협상 내막과 왜군 진영의 정세를 파악하고 대비책 마련에 힘썼다.
임진왜란 기간 전체 7년 가운데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싸움 뒤부터 1597년 7월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4년 이상은 전투보다 조선·명·일본 3국 사이의 강화교섭과 외교·첩보전이 더 치열했던 시기였다. 조선을 배제한 채 명·일 간에 진행된 비밀협상에선 일본이 강화조건으로 내건 조선 땅의 절반을 분할지배하는 문제까지 거론됐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 협상은 깨지고 말았지만 자칫 400여년 전 이미 한반도가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외세에 의해 분단됐을 뻔한 아찔했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조선도 일본과 강화교섭에 나섰고, 그 핵심 현장이 서생포 왜성이었다.
■ 첩보·외교전의 현장, 서생포 회담
“왜승 닛신(日眞)의 편지에 ‘5월에 대규모 군대가 (조선에) 나갈 적에 내가 따라갈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겁주는 말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대개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 더러는 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고 절박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13일치에 기록된 유정이 국왕 선조에게 올린 긴 상소의 일부다. 당시 유정은 정유재란 직전 이미 서생포 왜성으로 다시 돌아온 왜장 가토와의 마지막 회담 뒤 곧바로 사태의 위급함을 비변사에 알리고 이 상소를 올렸다. 이를 기록한 사관은 “당시의 병통을 적중시켰으니, 육식자(육식을 금하는 승려와 비교해 위정자들을 일컬음)들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었겠는가”라고 논평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이 대부분 본국으로 물러갔다가 다시 침략해 벌어진 정유재란은 명의 유격장군 선웨이징(沈惟敬)과 왜군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도해 진행했던 명·일간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비롯됐다. 명·일간 강화교섭은 임진왜란 발발 1년 뒤 조선 수군과 의병들에 의해 보급로가 끊이고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린 왜군이 동남해안 일대로 철수한 1593년 4월부터 부산에서 본격화됐다.
왜란때 조선 몰래 명·일간 강화교섭
‘조선 8도 분할’ 핵심의제로 진행돼
사명당이 가토와 ‘서생포협상’ 통해
비밀 캐내 국왕에 상소…대비책 마련 조선은 처음부터 강화에 반대했다. 이에 선과 고니시는 조선을 배제한 채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고, 여기서 일본이 강화조건으로 내건 △명 황녀의 일왕 후비 △조선의 8도 중 4도 할양 △조선 왕자와 대신의 인질 문제 등이 핵심 의제로 논의됐다. 더 이상 북진이 불가능해진 일본이 조선 땅 절반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속셈이다. 이에 대한 명의 공식 태도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 땅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지만 이미 왜군이 압록강까지 넘볼 위협이 사라진 터에 그 태도 추이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정과 가토의 서생포 회담은 선과 고니시가 이 문제를 싸고 1년 가까이 옥신각신하던 1594년 4월과 7월, 그리고 선과 고니시의 협상이 깨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7년 3월 등 3차례 열렸다. 조선은 애초 일본과의 강화에 완강히 반대했으나, 명이 “계속 강화에 반대하면 군대를 압록강 이북으로 빼겠다”며 압박을 가하던 터에 가토 쪽의 요청에 따라 회담에 응하게 됐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가토 진영에 승려나 불교도 참모가 적잖았던데다, 유정이 승려로서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 등 중요한 전투에 참전해 전란의 흐름을 잘 꿰고 있던 점을 고려해 가토와의 교섭 파트너로 유정이 선택된 것이다.
4월13일∼16일 진행된 첫 회담에서 가토는 “우리나라에서 큰 일을 의논할 때 고승을 불러 상의하는데, 귀국도 고승을 보내온 것은 이 일을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유정은 이 자리에서 가토를 통해 조선 4도의 할양 등 선과 고니시 사이에 논의되던 협상 내용을 알아냈고, 고니시가 주도하는 협상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라는 가토의 속내도 파악해 조정에 보고했다. 이후 조선은 명과의 외교채널은 물론 가토와 고니시의 경쟁·적대관계를 이용해 다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7월12일∼16일 두번째 회담이 끝난 뒤 유정은 그간의 내용을 토대로 ‘토적보민사소’라는 상소를 올려 왜군과의 강화와 토벌의 장단점을 고하고 왜군을 토벌해 백성을 구하는 개혁방안을 건의했다. 이후 유정은 12월23일 가토와 3차 회담을 시도했으나, 가토에 의해 거부됐다. 조선 쪽이 고니시와 따로 만나 ‘양다리를 걸쳐 기만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같은 해 11월 고니시가 명과의 강화협상과 별도로 조선에도 손을 내밀어 함양에서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만난데서 비롯됐다. 고니시는 ‘명과 관계를 트는데 조선의 주선’을 바랐고 김응서는 거부했다. 이 함양회담은 가토가 유정을 만나 조선과 교섭하는 것을 의식한 고니시의 대응으로 보인다.
이 무렵 고니시는 어떻게든 명·일간 강화를 성사시키려 선과 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를 만들어 명 조정에 전달했다. 결국 명이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1596년 9월 오사카 회담에서 최종 실패로 끝났다. 유정은 1597년 3월18일 가토의 요청으로 그와 만난 마지막 회담에서 가토를 설득해 일본의 재침을 막으려 온힘을 쏟았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서생포 회담은 당시 명과 일본이 주도하던 강화교섭에 끌려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국토 분단의 위기를 넘기는데 기여했다. 관심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정과 가토의 서생포 회담 내용은 <송운대사분충서난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책은 유정이 일기 형식으로 남긴 글을 뒤에 제자가 발간한 것이다. ‘송운’은 유정의 또 다른 법호다.
■ 서생포 회담 현장
유정과 가토의 강화회담이 열렸던 서생포 왜성은 해발 133m의 작은 산꼭대기에 본곽을 쌓고, 동쪽 경사면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례로 제2·제3곽을 두른 형태를 하고 있다. 북쪽 회야강에서 바다로 연결된 포구를 끼고 산지 쪽 본곽 및 제2곽의 내성과 아래 평지 쪽 제3곽의 외성을 연결시킨 일본식 평산성이다. 뱃길로 물자와 인력의 수송이 편리해 왜란 중 왜군의 중요 거점이 됐다. 외성 동북쪽 끝에 경사진 성벽과 선착장 자리가 있다.
산 정상의 내성 본곽에는 5m 높이에 18x17m 넓이의 천수대 터가 남아 있다. 천수대는 왜성의 가장 상징적인 심장부 같은 곳으로, 천수각 건물이 자리잡던 곳이다. 3층 규모로 추정되는 이 성의 천수각은 가장 전망이 좋은 높은 곳에 위치해, 평소 가토가 머물며 작전을 세우고 전투를 지휘했던 곳이다. 지금은 빈 터에 이 곳으로 오르는 돌계단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유정과 가토의 회담은 천수각 1층이나 본곽의 다른 가토 처소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발 133m 산꼭대기에 본곽 쌓고
아래에 제2·3곽 두른 일본식 평산성
왜란 뒤 조선 수군이 진성으로 사용
성곽 보존상태 어느 왜성보다 양호 내성 성벽은 현무암과 잡석을 섞어 5∼8m의 높이로 쌓았는데, 성문 양쪽이나 성벽 굴곡부에는 방어력을 높이려고 모난 축대를 돌출시켰다. 대부분 성벽 기울기는 60~70도이나 곳곳에 높이 2.5m 정도까지 45~55도의 완경사를 보이다 위로 올라가면서 60~70도로 급하게 꺾이는 형태의 성벽도 남아 있다. 또 외성 둘레를 따라 내성 쪽으로 좌우 양쪽에 60~70도 정도 기운 형태의 성벽이 6m 가량 높이로 300여m까지 길게 뻗어있고 그 바깥쪽엔 2~3중으로 깊게 구덩이를 판 해자를 둘렀다. 내성과 외성 전체 성곽 면적은 15만1934㎡, 동서 870m, 남북 370m 정도 규모고, 둘레가 4.2㎞로, 국내에 남아 있는 왜성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한 편이다.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은 “성의 규모가 웅대한 것이나 축성의 견고함 등을 고려할 때 서생포 왜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는 애초 이곳에서 장기적인 주둔 또는 항구적인 지배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토는 이 성을 쌓을 때 부산 기장군의 죽성리 왜성 처럼 북서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있던 조선 수군 만호진성(울산시기념물 35호)을 헐고 그 곳의 돌을 가져다 썼다. 그는 1596년 명·일 강화협상에 따라 일본으로 철수했다가 협상이 깨진 뒤 1597년 1월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다시 부산에 상륙해 이 곳으로 입성했다.
이후 11월엔 동쪽 최전선에 위치한 이 성의 수비 강화를 위해 북동쪽으로 약 35㎞ 떨어진 울산 태화강 하구에 울산왜성을 쌓았다. 하지만 12월 중순 성의 외곽부분이 완성되자마자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이듬해 1월 초까지 약 보름 동안 처절한 울산왜성 농성전을 벌였다.
한삼건 학장은 “가토가 울산에 왜성을 두개 남겼는데, 하나는 치열한 전투를, 또 하나는 치열한 강화회담을 벌인 대표적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가토는 왜란이 끝난 뒤 서생포 왜성 축성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규슈 구마모토 영지에 일본 3대 성의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구마모토에 있는 ‘울산마치’(蔚山町)는 당시 가토에 의해 끌려갔던 조선 석공과 도공 등 민간인 포로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전해진다.
서생포 왜성은 1963년 1월 국가 사적 54호로 지정됐다가,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와 관련해 지방문화재(울산시문화재자료 8호)로 격하됐다.
■ 왜성이 조선 수군진성이 된 까닭
왜란 때 서생포 왜성 축성 때문에 훼손된 서생포 만호진성은 지금의 서생면 화정리 회양강가에 야트막한 구릉의 경사면과 평지를 연결해 골짜기를 끼고 쌓은 포곡식 성이다. 성벽은 장대석을 가로눕혀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대형 석재로 기단석을 올린 뒤 위로 갈수록 보다 작은 돌로 면을 맞춰 쌓았는데 왜란 때 대부분 훼손되고 길이 440m 체성의 기단석 일부와 서쪽 문지로 보이는 시설 일부만 남아 있다.
왜란 뒤 서생포의 수군 만호는 동첨절제사로 승격됐고, 기존 진성이 훼손된 바람에 서생포 왜성을 1895년 까지 진성으로 사용하게 됐다. 1872년 제작된 ‘서생진포진성 지도’에는 서생포 왜성을 진성으로 사용한 모습이 잘 나와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진성을 서생포 왜성으로 옮기면서 산지 쪽의 내성은 그대로 두고 바다와 가까운 평지의 외성만 사용했다.
이 왜성은 부산 자성대 왜성 처럼 비록 왜란 중 왜군이 축성했지만 그들이 사용한 기간은 6년에 불과했고, 이후 300년 가까이 우리 조선 수군들이 진성으로 활용했다.
한삼건 학장은 “왜란 뒤에 조선 수군이 서생포에 진성을 새로 쌓는 대신 왜성에 주둔하면서 산지 쪽 내성은 손대지 않았다. 외성에서 내성을 지키는 구실을 한 것이다. 이 덕에 지금까지 성곽 보존상태가 어느 왜성 보다 양호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울산 울주군은 왜란 뒤 이 왜성 안에 세워졌다가 일제 강점기 때 파괴돼 없어진 창표당 복원을 위해 2011~2012년 울산의 한겨레문화재연구원에 맡겨 일대 터에 대한 유적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 때 창표당 관련 건물터는 물론 왜성과 관련한 성곽 및 건물터와 조선 후기 동첨절제사영과 관련한 동헌·객사 등 건물터도 확인됐고, 기와와 백자접시 및 옹기 파편 등 96점의 유물도 출토됐다.
창표당은 왜란이 끝난 지 1년 뒤인 1599년 왜적과 싸우다 숨진 53명의 지역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울주군은 지난해부터 13억67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이를 복원하는 창표사 건립 사업에 나서 내년 3월 준공할 예정이다.
-서생포 왜성 주소: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주변 관광지: 진하해수욕장, 간절곶 등대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
서생포 왜성 위치 및 구조
‘조선 8도 분할’ 핵심의제로 진행돼
사명당이 가토와 ‘서생포협상’ 통해
비밀 캐내 국왕에 상소…대비책 마련 조선은 처음부터 강화에 반대했다. 이에 선과 고니시는 조선을 배제한 채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고, 여기서 일본이 강화조건으로 내건 △명 황녀의 일왕 후비 △조선의 8도 중 4도 할양 △조선 왕자와 대신의 인질 문제 등이 핵심 의제로 논의됐다. 더 이상 북진이 불가능해진 일본이 조선 땅 절반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속셈이다. 이에 대한 명의 공식 태도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 땅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지만 이미 왜군이 압록강까지 넘볼 위협이 사라진 터에 그 태도 추이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정과 가토의 서생포 회담은 선과 고니시가 이 문제를 싸고 1년 가까이 옥신각신하던 1594년 4월과 7월, 그리고 선과 고니시의 협상이 깨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7년 3월 등 3차례 열렸다. 조선은 애초 일본과의 강화에 완강히 반대했으나, 명이 “계속 강화에 반대하면 군대를 압록강 이북으로 빼겠다”며 압박을 가하던 터에 가토 쪽의 요청에 따라 회담에 응하게 됐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가토 진영에 승려나 불교도 참모가 적잖았던데다, 유정이 승려로서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 등 중요한 전투에 참전해 전란의 흐름을 잘 꿰고 있던 점을 고려해 가토와의 교섭 파트너로 유정이 선택된 것이다.
서생포 왜성 성곽. 이 왜성은 국내에 남아 있는 왜성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울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서생포 왜성의 대부분 성벽은 기울기가 60~70도이나 곳곳에 높이 2.5m 정도까지 45~55도의 완경사를 보이다 위로 올라가면서 60~70도로 급하게 꺾이는 형태의 성벽도 남아 있다. 울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아래에 제2·3곽 두른 일본식 평산성
왜란 뒤 조선 수군이 진성으로 사용
성곽 보존상태 어느 왜성보다 양호 내성 성벽은 현무암과 잡석을 섞어 5∼8m의 높이로 쌓았는데, 성문 양쪽이나 성벽 굴곡부에는 방어력을 높이려고 모난 축대를 돌출시켰다. 대부분 성벽 기울기는 60~70도이나 곳곳에 높이 2.5m 정도까지 45~55도의 완경사를 보이다 위로 올라가면서 60~70도로 급하게 꺾이는 형태의 성벽도 남아 있다. 또 외성 둘레를 따라 내성 쪽으로 좌우 양쪽에 60~70도 정도 기운 형태의 성벽이 6m 가량 높이로 300여m까지 길게 뻗어있고 그 바깥쪽엔 2~3중으로 깊게 구덩이를 판 해자를 둘렀다. 내성과 외성 전체 성곽 면적은 15만1934㎡, 동서 870m, 남북 370m 정도 규모고, 둘레가 4.2㎞로, 국내에 남아 있는 왜성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한 편이다.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은 “성의 규모가 웅대한 것이나 축성의 견고함 등을 고려할 때 서생포 왜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는 애초 이곳에서 장기적인 주둔 또는 항구적인 지배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생포 왜성의 평지에 있는 외성과 산 쪽의 내성을 연결하는 300여m 길이의 성곽. 울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서생포 수군만호진성 터. 왜란 때 왜군이 서생포 왜성을 쌓기 위해 이 만호진성을 헐고 그 돌을 가져가는 바람에 지금은 기단석 일부만 남아 있다. 울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서생포 왜성 본곽으로 들어가는 통로 입구. 지난달 왜성 답사에 나선 부산 ‘초량왜관연구회’ 회원들이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울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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