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전국일반

왜구 막아냈던 ‘신라 의성’, 낙동강 진격 왜성으로

등록 2015-10-14 17:35수정 2015-10-19 14:13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 성곽의 모서리 부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 성곽의 모서리 부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⑥ 구포·양산·호포 왜성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또는 황지에서 발원해 영남 대부분 지역을 휘돌며 관통해 남해로 흘러간다. 함백산을 기준으로 본류 길이 525.15㎞, 남한에서 가장 길고 한반도 전체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은 세곡 운송로로서 교통의 동맥 구실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경상도에서 거둬 들인 세곡은 김해의 불암창, 창원의 마산창, 사천의 통양창 등 조창에 모아져서 해안을 따라 전라·충청도 해로를 거쳐 서울로 수송됐다고 한다. 그러다 해로의 위험 부담 때문에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게 됐는데, 조창에 모아진 세곡을 낙동강 수로를 통해 상주로 옮기면 육로로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의 가흥창으로 옮기고 거기서 다시 배편으로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운송한 것이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부산 북구 문화빙상센터 안 왜성유물전시관에 있는 구포왜성 모형.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부산 북구 문화빙상센터 안 왜성유물전시관에 있는 구포왜성 모형.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 구포 전성시대

조선시대 말인 1874년 경상도 양산군의 유림 대표 3명이 뜬금없이 서울 남산봉수대에 봉화를 올렸다가 의금부에 붙잡혀가 심문을 받았다. 앞서 1869년 양산군 소속이던 좌이면의 11개리 가운데 4개리가 구포면이란 이름으로 떨어져나가 동래부에 속하게 됐는데, 이들은 이에 맞서 경상감영에 20여차례나 진정을 해도 통하지 않자 서울에 올라가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구포면은 양산군 나머지 전체 지역에 견줘 가구수는 절반, 경제력은 거의 100배나 됐다. 이들 유림 대표 3명은 “동래는 만호의 대읍이요 양산은 천여호에 불과한데 구포면을 벌건 대낮에 횡탈해 갔으니 환속을 바란다”고 읍소했다. 결국 이듬해인 1875년 구포면은 양산군 좌이면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1896년 구포지역이 속한 양산군 좌이면이 부산부 좌이면으로 옮겨갔다가 1년만에 다시 양산군으로 원위치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들어 1910년엔 부산부 좌이면으로, 1914년엔 동래군 구포면으로 바뀌었고, 뒤에 구포읍으로 승격된 뒤 1963년 부산으로 편입됐다.

구포왜성 본성의 석축 모서리 부분. 돌을 한단씩 쌓아올릴 때마다 돌의 긴 쪽과 짧은 쪽을 서로 엇갈리게 쌓았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구포왜성 본성의 석축 모서리 부분. 돌을 한단씩 쌓아올릴 때마다 돌의 긴 쪽과 짧은 쪽을 서로 엇갈리게 쌓았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왜란 발발 이듬해 구포왜성 세워
인근 왜성에 연락·지원통로 활용
10여년전 터에서 유물 발굴했지만
외성은 빙상센터 들어서며 사라져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구포의 조선시대 이름은 감동포였다. 낙동강 하류 수로의 요지였던 감동포에는 1682년 세곡을 모아들이는 조창이 설치됐는데, 이를 감동창이라고 불렀고 낙동강 최남단에 있다는 뜻에서 남창이라고도 불렀다. 조창이 들어선 뒤로 감동포 나루(감동진)는 경북 상주의 낙동진, 경남 합천 율지의 밤마리 등과 함께 낙동강 3대 나루터로 꼽히는 물류 중심지로 번성했다. 1867년엔 마을 단위로 수확기에 곡물을 저장해 수해·가뭄·기근에 대비하기 위한 사창이 설치됐고, 나루터 인근에 시장이 서면서 상업이 발달해 191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민족계 지방은행인 구포은행(현 경남은행)도 설립됐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1933년 구포다리(현 낙동강교)가 개통되면서 구포지역의 낙동강 수로 및 물류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쇠퇴해 갔지만 사통팔달로 연결된 육상교통의 요지로 떠올랐다.

이은호 부산 북구 낙동문화원 사무국장은 “일제 강점기 때 구포장터의 3·1만세운동과 6·25전쟁 때 피난민들의 주린 뱃속을 싼 값으로 채워줬던 구포국수는 여전히 구포지역의 자랑거리와 명품”이라고 말했다.

낙동강 생태탐방로에서 바라본 구포왜성. 왼쪽 둥근 형태의 구릉에 본성이 있고, 오른쪽 빙상센터 건물이 외성이 있던 자리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낙동강 생태탐방로에서 바라본 구포왜성. 왼쪽 둥근 형태의 구릉에 본성이 있고, 오른쪽 빙상센터 건물이 외성이 있던 자리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가 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의 본곽 입구.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의 본곽 입구.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동아대 박물관은 지난 2002년과 2004년 빙상센터가 자리잡은 외성 터를 발굴조사해 긴 사각형으로 둘러싼 해자와 건물터 등 왜성 관련 유구를 확인하고, 일본 전국시대 조리 용구 스리바치와 중국 명나라의 청화백자, 분청사기, 기와 파편 등 유물을 출토했다. 또 3~4세기로 추정되는 삼한시대 목곽묘를 비롯해 고려·조선시대까지 중첩된 분묘 유구와 유물도 다수 나왔다. 빙상센터 안에 관련 유물전시관이 있지만 무관심 속에 관리도 제대로 안되고 있다.

이 왜성은 1595년 8월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에 따라 왜군이 철수하면서 한동안 비워져 있다가 정유재란 이후 1598년 3월 제7군 수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다시 들어와 개축했다. 이후 제3군 수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征)가 잠시 수비를 맡다가 5월에 서생포왜성으로 옮겨가면서 폐기됐던 것으로 보인다.

구포·양산·호포왜성 위치 및 구조(*누르면 확대됩니다.)
이 왜성은 감동포성 또는 구포 의성이라고도 불린다. 의성(義城)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때 이 곳에 성이 있었는데, 성을 지키던 황룡 장군과 500여명 군사들이 낙동강을 따라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수천명의 왜구들을 죽음으로 막아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구릉 이름도 의성산이라고 한다. 신라 장군 황룡이 죽음으로 왜구를 막아낸 그 자리에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왜구의 후손들이 다시 쳐들어와 의성의 흔적 대신 왜성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은호 낙동문화원 사무국장은 “의성 자리에 왜성이 있지만 황룡 장군은 물론 왜란 때 이 일대에서 왜적과 싸운 지역 의병들의 의기가 뚜렷이 남아 있어 지역주민들에겐 왜성보다 의성이란 이름으로 더 통한다. 왜성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존돼야 하고, 의성터와 관련한 발굴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산 호포왜성 터. 현재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이 들어서 있다. 강 건너 보이는 낮은 구릉에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이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양산 호포왜성 터. 현재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이 들어서 있다. 강 건너 보이는 낮은 구릉에 양산왜성(물금 증산리왜성)이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조선시대 전국 단위의 공공 업무 수행 및 전파를 위해 각지의 교통 요지에 중계시설인 역과 숙박시설인 원이 설치됐다. 역은 마필과 관원을 두고 중앙정부의 명령과 공문서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 보고 및 외국 사신 영송과 접대, 공공물자 운송 등을 맡았다. 원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 제공과 빈객 접대를 위한 숙박시설을 운영했다.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 구실을 했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 양산왜성과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바로 황산역과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한 대표적인 왜성이다.

수륙교통요지에 지은 양산왜성
부곽쪽 벽 허물어진 곳 수두룩
호포왜성은 흔적도 찾기 힘들어
“개발주의·무지로 문화자산 훼손”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져 왜군이 재침한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부산 북구 구포지역과 낙동강 하류 일대 전경. 사진 속 세개의 교량 가운데 가장 북쪽(오른쪽)의 낙동강교 오른쪽 끝부분에 있는 작고 둥근 구릉에 구포왜성이 있다.(2008년 12월 항공촬영) 부산시 제공
부산 북구 구포지역과 낙동강 하류 일대 전경. 사진 속 세개의 교량 가운데 가장 북쪽(오른쪽)의 낙동강교 오른쪽 끝부분에 있는 작고 둥근 구릉에 구포왜성이 있다.(2008년 12월 항공촬영) 부산시 제공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문화재 발굴조사도 하지 않은 상태로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다. 이 때문에 호포왜성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구포왜성 주소 :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 주변 관광지 : 화명생태공원, 구포시장, 상계봉, 백양산 등.

-양산왜성 주소 :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 주변 관광지 : 물금역, 황산역 근린공원, 오봉산 등.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1.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2.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3.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4.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5.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