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견내량왜성 상공에서 내려다본 견내량해협. 1592년 7월8일 조선 수군은 이곳에 집결해 있던 왜군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격파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의 결과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했고, 왜군은 거제도에 성을 쌓고 수비에 치중하게 됐다. 거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10) 거제 영등포·송진포·장문포·견내량 왜성
“조선 수군과의 싸움을 피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아 지키기만 하라.”
1592년 7월 한산도(경남 통영시 한산면)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에게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격노하여,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를 왜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보내 이렇게 명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령서(주인장)에서 “내년 봄 내가 조선에 건너가 직접 조선군을 격파할 것이니 그때까지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아 주둔하라. 조선 수군이 공격하면 지역 상황을 검토해 신중히 대처하고, 조선 수군에 먼저 전투를 걸지말라”고 지시했다.
서해를 거쳐 북상하려던 왜 수군 전략이 한산대첩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반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여세를 몰아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까지 공격했고,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해 왜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신부는 <일본사>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조선 병사들이 단결하고 연합해 수많은 선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배들은 견고하고 장대했으며 화약과 탄약, 군수품이 대단히 잘 갖춰져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을 만나면 습격하고 약탈하면서 해적질을 하며 다녔다. 더욱이 조선군은 일본군보다 해전에서 우수해 일본군에게 계속해서 커다란 피해를 주고 다녔다. 일본군은 해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조선군을 공격하기 위한 화기가 부족했으므로 해전에서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됐다”고 한산대첩 이후 조선 수군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거제도 북쪽 영등포·송진포·장문포 등 3곳에 왜성을 쌓고 수비에 치중했다. 이후 정유재란 때 거제도 서쪽 끝 견내량에 추가로 왜성을 쌓았다.
이순신의 수군 한산대첩서 대승
패전 보고받은 도요토미 분노해
“내년 봄 내가 조선에 건너갈테니
해전 중지하고 성 쌓아 주둔하라” 조선 수군,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다 1592년 5월7~8일 옥포·합포·적진포에서 벌인 해전과 5월29일~6월7일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벌인 해전 등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과의 2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한 왜군은 7월 초 조선 수군을 쳐부수겠다며 수군 정예부대로 총공세에 나섰다. 전함은 73척에 이르렀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은 왜군 수군이 거제도 서쪽 끝 견내량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월6일 출전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견내량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 등 함선들을 넓게 펼쳐 전투를 하기 곤란한데다 왜군이 형세가 불리해지면 뭍으로 달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7월8일 달아나는 척하며 왜군을 견내량 남쪽 넓은 바다로 유인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 전선들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뒤쫓아오자 갑자기 방향을 돌려 학익진을 펼치며 화포로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49척을 파괴하고 10척을 노획했다. 다음날인 9일에는 진해 안골포까지 진출해 왜선 42척을 더 파괴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가까스로 살아 김해로 돌아갔으나, 그의 부하장수인 와키자카 사베에(脇坂左兵衛)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은 전사하고,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사로잡히기 직전 할복했다. 뭍으로 달아난 왜군들은 조선 수군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솔잎과 해초를 먹으며 연명했다. 7월8일부터 10일까지 사흘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큰 전과를 거두면서 그 결과로 거제도 서쪽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 수군은 부산포해전과 웅천해전을 잇따라 벌여, 부산을 제외한 남해안 전역의 제해권을 틀어쥐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수정실록’은 한산대첩에 대해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초청으로 1593년 말 진해 웅천왜성에 종군신부로 왔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산대첩을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 지휘관은 조선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주는 수많은 피해에 대해 보고받고 자신들이 거느린 300척의 배로 구성된 대군을 보내기로 했다. 이 배들에 수많은 소총과 창, 활, 화살 등 해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적재하고 정예 병사들을 승선시킨 일본군은 자신들이 갖춘 우수한 군사력을 굳게 믿고 훨씬 적은 수의 배를 가지고 있는 조선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격했다. 바로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은 함성을 지르고 기뻐했으며 배로 일본 함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의 배는 장대하고 튼튼했기 때문에 일본 배를 장악하며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군은 화약으로 공격하면서 괴롭혀 일본군에게 대단히 애를 먹게 했다. 결국 일본 병사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노를 저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생긴 갈고리가 다린 쇠사슬을 위에서 떨어뜨리면서 포위했다. 해전이 몇시간 동안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기력은 이미 많이 약해졌고 전황은 점점 일본군에게 불리해졌다. 이 해전에서 관백의 총애를 받던 매우 용감한 장수 한명이 전사했다. 또다른 장수는 패배하자 뽀족한 수가 없음을 깨닫고 조선군에게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했다. 이 해전에서 조선군은 70척에 이르는 일본 함대를 물리쳤으며 일본 병사 거의를 죽였다. 살아남은 일본군들은 목숨을 다해 도망쳤다”고 소개했다.
이순신은 1593년 7월15일 전라좌수영을 여수에서 적의 코앞인 한산도로 옮겼다. 이순신은 “왜선들이 전라도로 침범하려면 반드시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편히 있다가 피로한 적을 기다려 먼저 선봉을 깨뜨릴 수 있는 요지”라고 판단했다. 한산도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고 한달 뒤인 8월15일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진해 앞바다와 낙동강 하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장문포왜성 성벽 보존상태 좋아
견내량 앞바다엔 선착장 시설도
왜군, 조선 수군을 피하려고 성을 쌓다
임진왜란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안의 최전방이었던 거제도를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이코마 지카마사(生駒親正),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도다 가쓰타카(戶田勝隆),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형제 등 시코쿠(四國) 출신들에게 맡겼다. 이들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사령관으로 하는 왜군 제5군으로 편성돼 조선으로 건너왔다. 시코쿠는 일본 본토를 구성하는 4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섬으로, 아와국·사누키국·이요국·도사국 등 4개 국으로 이뤄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쿠시마현·가가와현·에히메현·고치현 등 4개의 현으로 구성돼 있다.
이후 제4군에 편성돼 출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시마즈 히사야스(島津久保) 부자도 거제도 주둔군으로 합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도 왜군 제9군 사령관으로 출전해 거제도에 주둔군에 합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음력 5월18일 자신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한 뒤 조선의 왕으로 도요토미 히데카쓰를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조선에 건너온 왜군 장수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카쓰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군은 거제도를 군사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곳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왜군은 한산대첩에서 패한 직후 거제도 북쪽에 영등포왜성을 시작으로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 등 3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후 정유재란 때 거제도 서쪽 끝에 견내량왜성을 추가로 쌓았다. 이로써 거제도에는 모두 4개의 왜성이 축성됐다. 1595년 2월 접반관 자격으로 명나라 유격장 진운홍을 수행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웅천왜성을 다녀온 이시발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거제도 3개 왜성의 성주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거제도에 주둔했던 왜장 가운데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1592년 음력 6월2일 당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전투 도중 전사했고, 그의 동생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97년 음력 9월16일 역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의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히사야스는 1593년 음력 9월8일 거제도에서 병사했고, 도다 가쓰타카는 1594년 일본으로 철수하던 도중 병으로 숨진다. 조선 왕으로 임명될 예정이던 도요토미 히데카쓰 역시 1592년 10월14일 거제도에서 병사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을 예고했다.
영등포왜성은 거제도 북쪽 끝 구영마을 뒤 해발 257.7m 대봉산 꼭대기에 있다. 거제도 4개 왜성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다.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에서 북동쪽으로 3㎞가량 떨어져 있다. 바다 건너 북쪽으로 웅천왜성, 안골포왜성, 명동왜성 등과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숲에 둘러싸여 바다가 거의 보이지 않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해 앞바다는 물론 낙동강 하구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영등포왜성은 본성과 2개의 외성으로 이뤄져 있는데, 본성은 좁지만 길게 뻗은 산등성이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건설됐다. 현재 본성 안에 송신탑이 세워져 있으며, 송신탑을 설치하기 위해 임도를 건설하는 과정에 성벽 일부가 파괴됐다. 해안가 구영마을에 있는 외성은 구 영등포진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구 영등포진성은 성종21년(1490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된 조선 수군 진지이다. 둥근 형태로 성벽 길이는 320여m였다. 하지만 왜군은 구 영등포진성을 함락한 뒤 그 안에 새로운 성을 쌓아 주둔하면서, 구 영등포진성의 성벽을 방어벽으로 활용했다. 구 영등포진성은 경남도 기념물 제205호 구 영등성으로 지정돼 있다.
송진포왜성은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의 해발 90m 증산 꼭대기에 있다. 증산에 있기 때문에 증산왜성 또는 시루성이라고도 불린다. 직선 최단거리로는 200m에 불과한 장목만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장문포왜성과 마주보고 있다.
본성을 가운데 두고 산과 해안에 외성이 하나씩 있다. 현재 본성과 산 쪽 외성 사이에는 궁도장인 금무정과 도로가 건설돼 두 성을 단절시키고 있다. 바다 쪽 외성 인근 해안에는 밀물 때는 물이 들어찼다 썰물 때는 육지로 변하는 곳에 바윗섬이 있는데, 왜군들이 이 바윗섬을 깨어 성벽돌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이 바윗섬 곳곳엔 돌을 깬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장문포왜성 역시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의 북쪽으로 튀어나온 해발 107m 야산 꼭대기에 있다. 장목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송진포왜성과 마주보고 있다. 산 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바다 쪽에 외성을 뒀다. 천수각은 본성과 외성 모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수각 터 주변에는 지금도 조선기와 조각이 쉽게 발견된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 길이는 700여m에 불과하지만, 성벽 모서리는 허물어지지 않고 잘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4년 9월29일 장문포 앞바다에 돌입했으나, 왜적이 깊이 숨어 나오지 않았고 양쪽 봉우리에는 누각을 높게 세운 성곽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곳에 장목진을 설치해 왜구 침략에 대비했다. 현재 경남도 문화재자료 273호로 지정돼 있다.
거제도 북쪽에 있는 3개 왜성과 달리 견내량왜성은 거제도 서쪽 끝 견내량해협 근처에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있는 다른 왜성과 달리 거의 평지에 가까운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세워졌는데, 누가 세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곳은 폭 450~500m의 견내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거제도에서 육지인 통영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교통 요지이다. 견내량에서 남쪽으로 6㎞가량만 내려가면 조선 수군 기지인 전라좌수영이 있던 한산도이다. 따라서 1597년 음력 7월15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사실상 괴멸시키면서 남해안 제해권을 빼앗은 왜군이 견내량해협을 통과하는 조선 수군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광리마을과 인접해 광리왜성으로도 불린다.
견내량왜성에 인접한 바닷가에는 돌을 바닥에 박아 길이 20m 폭 4m가량 크기의 사각형 형태로 만든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있다. 현재 해자 등 성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있으나 성벽에 사용됐던 돌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평지에 있는데다 마을에 가까워, 집을 짓는 등 임진왜란 이후 여러 곳에서 성벽돌을 빼간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 안 부분은 밭과 과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쪽에는 견내량해협을 가로질러 거제와 통영을 연결하는 거제대교, 신거제대교가 잇따라 건설돼 있다.
-영등포왜성 주소 :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29-2.
-송진포왜성 주소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산6-3.
-장문포왜성 주소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산130-43.
-견내량왜성 주소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267.
-주변 관광지 : 거가대교, 농소몽돌해수욕장,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등.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움말: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거제도 왜성.
패전 보고받은 도요토미 분노해
“내년 봄 내가 조선에 건너갈테니
해전 중지하고 성 쌓아 주둔하라” 조선 수군,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다 1592년 5월7~8일 옥포·합포·적진포에서 벌인 해전과 5월29일~6월7일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벌인 해전 등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과의 2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한 왜군은 7월 초 조선 수군을 쳐부수겠다며 수군 정예부대로 총공세에 나섰다. 전함은 73척에 이르렀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은 왜군 수군이 거제도 서쪽 끝 견내량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월6일 출전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견내량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 등 함선들을 넓게 펼쳐 전투를 하기 곤란한데다 왜군이 형세가 불리해지면 뭍으로 달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7월8일 달아나는 척하며 왜군을 견내량 남쪽 넓은 바다로 유인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 전선들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뒤쫓아오자 갑자기 방향을 돌려 학익진을 펼치며 화포로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49척을 파괴하고 10척을 노획했다. 다음날인 9일에는 진해 안골포까지 진출해 왜선 42척을 더 파괴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가까스로 살아 김해로 돌아갔으나, 그의 부하장수인 와키자카 사베에(脇坂左兵衛)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은 전사하고,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사로잡히기 직전 할복했다. 뭍으로 달아난 왜군들은 조선 수군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솔잎과 해초를 먹으며 연명했다. 7월8일부터 10일까지 사흘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큰 전과를 거두면서 그 결과로 거제도 서쪽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 수군은 부산포해전과 웅천해전을 잇따라 벌여, 부산을 제외한 남해안 전역의 제해권을 틀어쥐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수정실록’은 한산대첩에 대해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문포왜성 성벽 모서리 모습. 장문포왜성은 장목만을 사이에 두고 송진포왜성과 마주보고 있다. 거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장문포왜성 성벽 보존상태 좋아
견내량 앞바다엔 선착장 시설도
영등포왜성 성벽 모서리 모습. 영등포왜성은 1592년 7월 한산대첩 직후 쌓은 거제도 첫 왜성이다. 거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송진포왜성 성벽. 사진 오른쪽과 왼쪽 성벽돌이 확연히 다르다. 애초 비스듬하게 성벽을 쌓았으나 왼쪽에 돌을 덧대 성을 확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장목만에서 외해 쪽으로 바라본 풍경. 고작 200m가량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산 꼭대기에 송진포왜성, 왼쪽 산 꼭대기에 장문포왜성이 자리잡고 있다. 거제/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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