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여기서 투표하는 주민들을 몰래 블랙박스로 찍은 거야?”
영덕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치러진 11일 오후 4시40분. 경북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 오일시장 옥상에 마련된 영덕읍 제2투표소 앞에서 대여섯명의 주민이 승용차 안에 앉아 있는 남성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남성에게 차량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남성은 나오지 않았다. 불이 깜빡이는 승용차 블랙박스는 6m 떨어진 투표소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경찰관이 승용차에 다가와 운전자에게 내릴 것을 요구했다. 키가 180㎝ 정도인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승용차에서 내렸다. 주민들은 이 남성에게 “아까 점심때부터 주차돼 있던데 언제부터 블랙박스로 투표하는 사람들을 찍은 거냐”, “당신은 누구냐”며 따졌다. 하지만 이 남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찰관이 “어디서 오신거냐”고 묻자, 이 남성은 마지못해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이라고 대답했다. 한수원은 원전은 운영하는 공기업이다,
이 남성이 연락을 하자 어디선가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성 3명이 나타났다. 곧 이들과 주민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민들은 “한수원 관계자가 오랫동안 투표소 앞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몰래 블랙박스로 투표하는 주민들을 찍은 것 같다. 초상권 문제 등이 있으니 블랙박스 영상을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남성들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없다. 주민들이 오히려 승용차 안에 있던 직원에게 욕설을 하고 담뱃재를 날렸으니 나중에 블랙박스 영상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처음 경찰관에게 한수원에서 나왔다고 말한 20대 남성은 말을 바꿔 “한수원이 아니다”라고 했다. 경찰관이 “아까는 한수원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이 남성은 “제가 (주민들) 엿 먹으라고 그렇게 말한 거면 어쩔거냐”고 되물었다. 이 말을 들은 60~70대 주민들은 “저런 어린 놈이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라며 혀를 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은 “영장 없으면 경찰은 우리 블랙박스를 가져가지 못하고 우리를 여기 잡아둘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결국 저녁 6시6분께 경찰관과 주민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승용차를 몰고 사라졌다.
영덕읍 제2투표소 앞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은 “한수원과 영덕군 공무원들이 하루종일 온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고, 투표소 곳곳에서도 누군가가 서성이며 감시를 하는 것 같다. 정부와 경북도, 영덕군이 주민들에게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니까 투표를 하러 나온 주민들은 부담을 갖고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덕 원전 찬반 주민투표가 치러진 첫날 영덕지역에 설치된 20곳의 투표소 주변에서는 이렇게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투표소 주변 곳곳에는 한수원 직원 또는 한수원에서 고용한 용역업체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서성댔다. 투표를 하러 온 주민들은 투표를 마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투표를 하러 나온 주민 대부분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쳤다.
영덕읍 제3투표소에서 만난 주민 김아무개(56)씨는 “원전 유치하고 정부로부터 지원 받아봐야 마을회관 증축하고 도로 포장 조금 더 앞당겨서 한다는 것 밖에 없고 안전성도 보장되지 않는다. 2010년 원전 유치 신청한 것 자체가 첫단추를 잘못 끼웠던 일이었고 결국 조용했던 영덕이 이렇게 시끄러워졌다”고 했다. 영덕/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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