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천왜성의 모습. 왼쪽 위 끝부분에 있는 사각형이 천수각 터이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2007년 복원된 사천왜성 성문과 성벽. 목조건물인 성문은 일본 히메지성 성문을 본땄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1598년 음력 10월1일 오후. 이날 새벽부터 시작됐던 치열한 전투가 끝난 사천왜성 앞 들판엔 숨진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주검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이 널부러져 있었다. 주검의 행렬은 40리 떨어진 진주 남강까지 이어졌다. 정유재란을 포함한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왜군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사천왜성 전투이다.
왜군들은 전사자들의 목을 모두 베고, 코까지 베었다. 달아나는 조·명 연합군을 진주까지 쫓아갔던 왜군들은 민간인들도 닥치는대로 죽여서 코를 베었다. 베어낸 코는 큰 나무상자 10개에 담고 소금으로 절였다. 승전의 증거물로 본국에 보내려는 것이었다.
왜군은 전공을 확인받기 위해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군의 머리를 잘라 본국에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겁다는 이유로 이후에는 왼쪽 귀를 잘라 보냈고, 정유재란 때는 코를 잘라 보냈다.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도 닥치는대로 죽여 귀와 코를 잘랐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오가와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는 <조선물어>에서 “조선 사람 머리 18만538개, 명나라 사람 머리 2만9014개 등 21만4752개를 교토 헤이안성 동쪽 대불전 부근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고 기록했다. 남원지역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 “왜적은 사람을 보면 죽이든 안죽이든 무조건 코를 베어 갔다. 전쟁이 끝난 뒤 거리에서 코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썼다.
통양창성 성벽. 임진왜란 때 사천에 주둔한 왜군은 고려 초부터 있었던 통양창성 안에 사천왜성을 쌓았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통양창성 성벽. 임진왜란 때 사천에 주둔한 왜군은 고려 초부터 있었던 통양창성 안에 사천왜성을 쌓았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천왜성에 주둔했던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집안에 전해지는 <시마즈 중흥기>를 보면 “시마즈 타다쓰네(島津忠恒) 군대 1만108명,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 9520명,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군대 8383명 등이 조·명 연합군 3만8717명의 목을 베어 그 코를 잘라 10개의 큰 나무통에 넣고 소금으로 절여 본국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 타다쓰네는 요시히로의 아들이고,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형이다. 하지만 사천왜성 전투에 투입됐던 조·명 연합군은 2만9000여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전사자는 8000여명이었다. <시마즈 중흥기>에 적힌 숫자가 맞다면, 왜군들이 인근 고을의 무고한 백성들까지 대량 학살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왜군은 조·명 연합군 전사자들의 주검을 사천왜성 앞에 파묻었는데,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자 700m가량 떨어진 곳에 옮겨 파묻었다. 이 무덤은 명나라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당병무덤’또는 목 잘린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댕강무데기’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패전의 기억’은 잊혀져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조그만 언덕으로 알고 있었다.
사천문화원 등 사천지역 단체들은 1983년 11월4일 이 무덤을 가로 세로 각 35m의 네모반듯한 형태로 정비해 ‘조명군총’이라 이름 붙이고, 무덤 앞에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를 세웠다. 1992년 4월엔 일본 교토 도요쿠니신사 앞에 있는 조선인 귀무덤의 흙을 항아리에 담아 가져와 조명군총 옆에 안치했다. 조명군총은 1985년 11월7일 경남도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됐다.
공대원 사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우리가 복원할 때까지 400년 가까이 어느 누구도 조명군총을 돌보지 않고 방치해, 이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조명군총을 복원한 뒤 해마다 양력 10월1일 제향을 올렸으나, 올해부터는 사천왜성 전투가 일어난 1598년 음력 10월1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30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명 연합군, 왜군에 대패하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재침해 7월부터 북상하던 왜군은 두달만에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남해안으로 후퇴했다. 왜군은 본거지인 부산과 별도로 세군데에 거점을 뒀는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로군은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서로군은 전남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의 중로군은 경남 사천에 주둔했다.
사천은 북쪽으로 진주와 남강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큰 바다와 통하면서, 동서쪽으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거제와 남해로 통하는 해안 요충지에 1597년 10월29일부터 12월27일까지 채 두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사천왜성을 쌓았다. 또 조·명 연합군이 남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남강 건너편에 망진왜성도 설치했다.
조선에 온 명군은 1598년 8월 군대를 4개로 나누어 한꺼번에 진격하는 사로병진 작전을 펼쳤다. 동로군의 제독 마귀는 울산왜성, 중로군의 제독 동일원은 사천왜성,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순천왜성을 각각 공격했다. 수군 제독 진린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조선군은 명군과 힘을 합쳐 연합군을 구성했는데, 지휘권은 명군이 쥐었다.
명나라 제독 동일원은 9월20일 명군 중로군 2만6800명과 경상우병사 정기룡 휘하 조선군 2215명으로 이뤄진 조·명 연합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왜군으로부터 진주성을 되찾았다. 이후 남강을 건너 망진왜성을 부수고, 9월28일 사천에 도달해 왜군이 차지하고 있던 사천읍성도 되찾았다.
경남 진주시 망경동 망진산 꼭대기 망진왜성 터에서 내려다본 진주시내 전경.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성 등 진주 옛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복원된 망진산 봉수대. 임진왜란 때는 망진왜성에 주둔한 왜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8월18일 죽음에 따라, 당시 왜군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를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무사히 일본으로 철수하기 위해 진주와 사천 곳곳에 배치돼 있던 왜군을 사천왜성으로 집결시켰다. 그 수는 1만2000여명이었다.
명군은 수적 우세를 앞세워 10월1일 새벽 사천왜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에 나섰다.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신중히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동일원은 “왜군을 전멸시키고 아침밥을 먹자”며 정리룡의 건의를 무시했다. 하지만 2시간가량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도중 명군 진중에서 화약 폭발사고가 일어나면서 전세가 갑자기 역전됐다. 성안에서 방어만 하던 왜군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나와, 폭발사고로 우왕좌왕하던 조·명 연합군 8000여명을 몰살시켰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군량미와 무기 등을 모두 버리고 남강 건너로 달아났다. 이후 동일원은 사천왜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천왜성 전투 결과에 대해 일본 조정은 ‘삼국무쌍’이라고 격찬했다. 조선·일본·명 3국을 통틀어 임진왜란 최고의 승전이라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 정부를 이끌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는 전공을 인정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영지를 추가로 내렸다.
11월16일 사천왜성을 버리고 일본으로 철수하려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순천왜성에 고립돼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11월18일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소 요시토시(宗義智)군 등 1만2000여명의 병력과 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을 향해 바닷길로 진출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이를 미리 파악하고 남해와 하동 사이 좁은 바다인 노량해협에서 왜군을 막았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11월19일 새벽부터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왜군은 450여척의 함선을 잃고 달아났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도 왜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정유재란을 포함해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가 11월26일 일본으로 철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으로 돌아가며 전국에서 붙잡은 조선 도공 70여명도 끌고가 자신의 영지인 사쓰마에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했다. 다른 왜군 장수들도 조선 도공들을 끌고 갔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는 직접 도자기를 빚을만큼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도자기 재료인 고령토까지 싣고 갔다. 그는 조선 도공들을 위한 마을을 만들어 수준 높은 작품을 생산하도록 후원했다. 당시 끌려간 도공은 김해 또는 금해, 변방중, 박평의, 심당길, 장일육, 신무신, 신주석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쓰마 도자기의 다테노요, 조사요, 류몬지요, 나에시로가와요, 와쿠타요 등 여러 분파의 원조가 됐다.
왜군, 경남에 최후의 보루를 쌓다 사천왜성은 사천읍성에서 서남쪽으로 7㎞가량 떨어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바닷가의 해발 30m 낮은 구릉에 있다.
선진항 북쪽에 있어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와 접한다. 동서 550m 남북 600m 크기로, 성은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육지와 유일하게 통하는 동쪽으로는 폭 30m의 해자를 설치하고 바다 쪽으로는 목책을 박아 방어했다. 바다에서 보면 섬처럼 보이기 때문에 ‘법질도’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남쪽과 북쪽 바다가 매립돼 육지로 변했기 때문에, 서쪽만 바다와 접해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이케다 히데오(池田秀雄),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다카하시 나오쓰구(高橋直次) 등이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군 1만여명이 주둔했다.
하지만 왜군이 성을 쌓기 이전에 이미 이곳엔 성이 있었다. 선진항에는 고려 초기 세곡을 보관하는 통양창이 있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창성이 있었다. 왜군은 통양창성 안에 왜성을 쌓았다. 2000년대 들어 모두 네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사천왜성은 기존 통양창성의 성벽과 시설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통양창성 터에서는 신석기시대 토기와 석기, 통일신라시대 석관묘와 비석 등 통양창성 축성 이전 시기의 유물도 대량 출토됐다. 현재 통양창성의 성벽은 920m가량 남아있다.
왜군은 사천왜성을 쌓기 전인 1592년 5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이곳에 상륙해 진을 쳤는데,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사천 선창에 왜군이 주둔했다는 연락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5월29일 수군을 이끌고 출전해 왜선 13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사천해전은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한 전투이기도 하다.
1936년 5월 고적 제81호로 지정하는 등 일제강점기 일본은 사천왜성을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했다. 사천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은 1918년 성터 일부를 사들이거나 기부받아 공원으로 조성하고, 성 안에 벚나무 1000여그루를 심었다. 이들은 왜군 장수의 지휘소인 천수각 터에 사천신채전첩지비(四川新寨戰捷之碑)라 새긴 비석도 세웠는데, 1945년 해방 직후 지역 주민들이 없앴다.
우리 정부는 1963년 1월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했다가, 98년 11월13일 지방문화재로 격하시켜 경남도문화재자료 274호로 재지정했다. 사천시는 78년 12월 공원 안에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를 세웠다. 일본인들이 세웠던 비석 자리에는 6·25전쟁 때 전사한 공군장병과 경남 사천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임무 수행 도중 숨진 공군장병들을 기리는 충령비가 서있다.
지금도 벚꽃이 피는 봄이면 많은 사천시민들이 이곳을 찾는데, 사천시는 2006년 3월~2007년 12월 21억5000여만원을 들여 성벽 886m와 성문 1곳 등을 복원했다.
사천왜성 안에 세워져 있는 이충무공 사전해전 승첩기념비. 1592년 음력 5월29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복원된 사천왜성 천수대. 현재 우리 공군의 충령비가 천수대에 세워져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하지만 복원된 사천왜성은 제대로 된 고증과 감리 없이 그저 조잡하게 흉내만 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성벽 모서리는 긴 면과 짧은 면의 돌을 번갈아 쌓아 올리는 왜성 축성술의 대표적 특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성벽 기울기도 제각각이다. 모서리는 벌써부터 비틀어져 에스(S)자로 휜 곳도 있다. 심지어 돌을 세로로 끼우거나, 큰 돌들 사이 틈을 부스러기 돌로 메운 것도 발견된다. 모서리 일부가 깨져 접착제로 붙인 것도 있다. 복원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곳곳의 성벽 돌은 갈라지거나 부서지고 있다. 이 때문에 400여년 전 성벽과 여기에 덧대 복원한 성벽은 누가 보더라도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현장을 살펴본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부실 날림 복원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대원 사천문화원 사무국장도 “복원 과정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아 왜 이렇게 복원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철저히 왜성 방식을 지킨 것도 그렇다고 우리 전통 방식으로 쌓은 것도 아니면서 일본과 우리 방식을 섞어놓은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복원을 했다”고 말했다.
망진왜성은 경남 진주시 망경동 해발 172m 망진산 꼭대기에 있다. 이곳에선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조·명 연합군이 남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사천왜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휘하 장수인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왜군은 1593년 6월말 진주성을 함락한 직후 이곳에 진지를 설치했기 때문에, 1597년 10월 사천왜성을 쌓으며 망진산에 있던 진지 둘레에 목책을 세워 작은 성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주둔한 병력은 300여명이었다.
현재 망진산 꼭대기에 성벽 유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한국방송공사(KBS) 방송탑, 망진체육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꼭대기에서 240m 떨어진 곳에 조선시대 봉수대가 복원돼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왜성 주소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
-사천왜성 주변 관광지 : 조명군총, 항공우주박물관, 사천읍성 등.
-망진왜성 주소 : 경남 진주시 망경동 산30-3.
-망진왜성 주변 관광지 : 진주성, 인사동 골동품거리, 진주향교, 진양호 등.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움말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