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도심의 상징거리인 김일성광장 일대. 정면에 보이는 한옥형 건물이 인민대학습당이고 그 아래 오른쪽에 정무원, 다시 아래에 조선역사박물관(왼쪽), 조선미술박물관(오른쪽)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1991년 조선화보사에서 펴낸 <조선에서의 건설>에서 발췌.
안창모 교수 시정연 강연 “서울의 도심은 자본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하며, 평양의 도심은 공공성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28일 서울 서초구 중회의실에서 ‘동북아 도시 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연 ‘평양의 도시와 건축’이라는 강연회에서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서울·평양 도시건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안 교수는 평양의 도시 구조는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해 인민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평양의 도심은 문화시설로 가득하다. 서울의 사대문안쯤 될 평양의 중 구역에서 김일성광장은 한국의 세종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인민대학습당(1982)에서 대동강을 거쳐 동평양으로 이어지는 선이 평양의 상징거리 역할을 한다. “시청광장 조성 예처럼 시민위한 공간 넓혀야” 북한은 1980년대 이 상징 거리의 서쪽끝에 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인민대학습당을 배치했고, 1950년대 이 건물 앞의 김일성 광장 남북에 조선역사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이 마주 지었다. 중 구역은 이밖에도 대동문, 연광정 등 문화유적과 만수대예술극장, 조선혁명박물관, 평양체육관, 빙상관 등 공공시설로 구성돼 있다. 안 교수는 “평양의 도심은 서울의 세종로·태평로 일대가 세종문화회관을 빼면 정부청사와 주한 미대사관, 대기업 사옥과 너른 차로로 채워진 것과 대비된다”며 “시청광장 조성처럼 서울 도심을 시민들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이어 “평양은 매우 오래된 도시지만 서울에 비해 과거의 유산이 더 적게 남아있으며, 해방 뒤 건축이 활발하게 이뤄졌다”며 “해방 당시 서울보다 도시 인프라가 부족했고,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잿더미가 된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고 밝혔다. 평양의 건축은 시대 상황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 김일성종합대학(1948), 평양역(1954) 등 평양의 건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석조기둥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주의 양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부터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린 이른바 ‘민족건축’이 나타나며, 이는 주체사상과 세습체제가 등장하는 70년대에 본격화한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이르면 민족건축의 현대화, 국제화가 이뤄져 기와는 더이상 쓰이지 않고 목조양식의 디자인만을 건물 벽면에 살린다. 4·25문화회관(1975), 개선문(1982) 등이 대표적인 예다. 안 교수는 “서울과 평양은 워낙 이념과 사회의 토대가 달라 서로 비교하기 어렵다”면서도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공유한 남·북한이 60년의 분단을 겪으며 얼마나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을 만들어왔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라고 말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