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청주 우시장. 청주 육거리시장의 모태가 된 청주 우시장은 경기 수원에 이어 전국 2위권 시장으로 청주의 상징이었다. 사진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제공
충북 청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무심천변엔 쇠전(우시장)이 있었다. 전국 으뜸이라던 경기 수원 우시장에 버금갔다. 쇠살주(중개인), 소몰이꾼 등이 몰리면서 그야말로 소 반 사람 반이었다. 이엉에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우시장 옆 피전에선 팔도 사투리들에게 국밥·순대 등을 팔았다. 이제 이곳은 청주 육거리 시장으로 불린다. 지금도 점포 1200여곳, 새벽 노점상 500~600명 등 3000여명이 종사하는 지역 대표 시장이다.
근대 청주로 안내하는 타임머신이 책으로 나왔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이 낸 <근대 청주의 자화상>(사진)이다. 충북의 정치·경제 1번지였던 우시장 주변 남주동과 남문로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람 이야기를 엮어 냈다.
강석균(85) 대동한약방 대표, 이쾌재(85) 전 청주제일교회 목사 등 그 시절 ‘한가닥’했던 8명이 말하고, 이병수(49)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차장, 이재표(47) <청주마실> 대표 등 4명이 꼼꼼하게 받아 적었다. 이재표 대표가 한 시장 상인과 라면에 소주 네 병을 비우고서야 육거리 시장 이야기를 기록하는 등 발품과 경청이 책을 낳았다.
추억을 선명하게 안내하는 빛바랜 사진이 압권이다. 대성학원 졸업사진(1924), 청주 모던보이(1930년대), 전통혼례(1950년대), 무심천 취로사업(1975년) 등…. 삼호사진관을 운영했던 고 김동근(1908~1974)씨 유족이 제공했다.
청주를 상징하는 양대 먹을거리인 해장국과 삼겹살에 대한 얘기도 재밌다. “6·25 나고 시작했지. 한 그릇에 10원 했는데 장사가 잘됐어. 머리가 훌떡 벗겨진 운보 할아버지(김기창 화백)는 하루도 안 빠지고 왔어.” 어머니와 남주동해장국을 운영한 장경례(88)씨의 말이다. 삼겹살 거리에 축제까지 하고 있는 청주 삼겹살의 뿌리도 찾아냈다. 민병구(79) 전 교사는 “청주 삼겹살은 그때 말로 시오야키인데 만수식당이 원조여. 그 집 돈 많이 벌었어”라고 추억했다. 지금 한국도자기가 남주동 그릇가게 삼광사에서 출발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남주동·남문로는 시대의 아픔도 함께 누렸다. 지철희(77) 청주대장간 대표는 “미군 폭격으로 남주동과 시장이 불바다가 돼 버렸지. 이후 인민군들이 미군에게 쫓기면서 당산에서 학살을 해 시체가 산더미 같았어”라고 했다. 민주화의 요람으로 불리는 청주제일교회 이야기도 발굴했다. 이쾌재 목사는 “한때 제일교회를 빨갱이 교회라고 하기도 했어. 딴 데는 집회를 못 하게 하니까 몰려들었고, 청주 민주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지”라고 추억했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은 21일 저녁 청주 내덕동 동부창고34에서 북콘서트를 한 뒤 발행한 책 1000권을 시민 등에게 나눠줬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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