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16일 오전 9시40분께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이었던 정광민(58)씨는 대학 인문사회관에서 “안정 성장 정책과 공평한 소득분배, 학원 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정치보복 중지, 유신헌법 철폐, 대통령 하야” 등의 요구안을 적은 유인물 90장을 학우들한테 나눠줬다.
정씨는 오전 10시께 부산대 도서관 앞에 모인 1000여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애국가 등을 부르며 대학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대학교 정문 쪽으로 행진했다. 정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정씨 등 대학생들을 막아선 뒤 강제 해산했다.
이어 정씨는 오전 11시께 도서관 앞에 다시 모인 500여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앞선 요구사항을 선창하면서 도서관을 출발해 운동장을 돌고 정문 앞에 섰다. 대학생들은 경찰의 봉쇄에 막혀 주춤했지만, 정문 옆 담장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정씨는 대학생들과 함께 부산대 사범대부속고교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된 부마민주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씨는 수사 당국에 곧바로 수배됐다. 그는 1979년 10월19일 부산 동래경찰서에 자수했지만, 시위의 주동자라는 이유로 유치장에 갇혀 물고문과 통닭구이 등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정씨한테 “아버지가 고정 간첩이지”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경찰의 이어지는 고문에 부산 동래구의 ㄷ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기도 했다.
정씨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등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다가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풀려났다. 그는 같은해 12월27일 부산지법에서 면소(법령이 사라짐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음) 판결을 받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예비검속 대상으로 체포돼 고문받은 뒤 같은해 8월8일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산대도 정씨를 출학처분했다.
부마민주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법원으로부터 면소 판결을 받았던 정씨가 37년 만에 전과자 굴레를 벗었다.
부산지법 형사6부(재판장 유창훈)는 22일 정씨가 지난 2013년 7월 제기한 긴급조치 제9호 위반 등 혐의의 면소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정씨한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은 적용법령인 긴급조치 제9호가 당초부터 위헌·무효라서 범죄로 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37년 만에 전과자 기록을 지우게 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 계승사업회 회장인 정씨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법원의 무죄 판결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과 저항이 정당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민주주의 후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안타깝다. 이땅에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한테 부끄럽다”고 덧붙였다.
정씨의 변호인은 “정씨는 부마민주항쟁당시 불법 구금과 고문 등 피해를 입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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