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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항아리처럼 못난 물건들에도 정직한 삶의 흔적이…”

등록 2016-05-03 18:54수정 2016-05-03 20:48

광주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
광주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
[짬] 광주 비움박물관 개관 이영화 관장
“시증조부의 오래된 서류함과 담배함 등을 버리시려는 것을 우연히 보고, 제가 간직했어요.” 지난달 29일 오후 광주광역시 대의동 비움박물관에서 만난 이영화(69) 관장은 “마치 운명처럼 오래된 물건에 꽂혔다”고 말했다. 40여년 전부터 그는 시댁에 갈 때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버린 생활용품을 주워 와 모으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은 버리고 불태워도 되는가?”라는 막연한 의문이 들었다. 20여년 전부터는 궁동 예술의 거리에서 열리는 주말 개미시장에 나가 옛 생활용품을 수집했다. 지역에서 이름난 수집가들이 주로 골동품과 미술품 등을 사들이던 것과 달랐다. “무명과 삼베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고작 5천~6천원씩에 팔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렸어요. 목화를 심어서 키워 길쌈을 해 옷 한 벌 짓는 데 1년 넘게 걸리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니까요. ‘돈이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 베를 짠 분들의 정성이 아까웠어요.”

40여년전 시증조부 담배함이 시작
20년전부터는 주말 개미시장 ‘단골’
“운명처럼 오래된 물건에 꽂혔다”

자녀들 권유로 개인 박물관 지어
사계절 ‘세월의 장터’ 전시실 ‘호평’
“막사발처럼 빈그릇 보며 채워가길”

이 관장은 한 건물 지하를 빌려 생활용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애들이 귀찮아하지 않고 ‘오래된 민속품이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줘 큰 힘이 됐어요.” 어느덧 2000년 무렵부터는 개미시장에서도 민속 생활용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양장점에서 옛 무명에 천연염색을 해서 파는데 값이 점점 오르더라고요.” 그제야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버렸던 옛 생활용품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50~100년 된 농경시대 생활용품 2만여점을 모았다. 그는 “가난했지만, 온몸을 바쳐 살아낸 부지런하고 정직한 삶의 흔적”이라고 표현했다.

이 관장은 옛 광주읍성 동문 터에 5층 규모의 박물관(1653㎡)을 지어 지난 3월 개관했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후손들이 두고두고 보면 좋겠다”는 자녀들의 권유에 용기를 냈다. 개인 박물관으론 드물게 항온·항습 장치까지 완벽하게 갖췄다. 문제는 민속품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설치미술 전문가한테 맡기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런데 이 관장의 둘째 아들(40)이 “민속품에 가장 애정이 있는 분이 전시의 틀을 짜는 게 맞으니 어머니 생각대로 꾸미시라”고 제안했다. 박물관 이름은 ‘비움’으로 지었다. “소쿠리나 막사발 등등 우리의 모든 그릇들이 비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아름다움을 채워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관장은 전시실 4개 층을 사계절로 나눠 ‘세월의 장터’로 꾸몄다. “하얀 사발을 도열해두고 선반에 베개 자수의 오색 복 문양들을 각양각색으로 배열해놓은 부분은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설치작품”(황지우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문화·예술 관련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이 관장은 “민속품을 보고 생각나는 대로 쓴 시”들도 벽면에 걸었다. 겨울 전시실 들머리엔 대문 앞에 쳐두었던 새끼 금줄을 걸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똥항아리다. “똥항아리만 보더라도 ‘조상의 지혜’를 실감해요. 밑부분이 삼각형인 것은 똥을 풀 때 사납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저걸로 농사를 짓고 자연으로 순환을 시켰어요.” 남근 모양의 목각을 붙여놓은 오래된 써레엔 아들을 좋아하던 풍속이 녹아 있다.

3층 가을 전시관으로 가는 통로는 “자연에 내준 공간”으로 하늘이 보였다. 전시실엔 마당에 있었던 대나무 닭장, 부엌에 있었던 살림살이들, 논에 갖고 나가던 대나무로 만든 밥그릇 등 세월이 묻어나는 생활용기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소의 등을 긁어주기도 하고 짚풀·왕골을 갈무리하던 빗들도 아름답고, 짚신을 만들던 신꼴, 갓의 먼지를 털던 갓솔에선 우리의 문화적 토양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워낭(소의 목에 매다는 방울)이에요. 농경시대 소는 한 가족이었어요. 쇠죽을 쑤어 소에게 먼저 주고 나서 주인이 밥을 먹었어요. 소는 일도 하고 채찍도 맞았지만, 대접을 받았어요. 일도 안 하고 채찍도 안 맞는 요즘 소의 신세가 (과거보다) 더 나은 것일까요?”

여름 전시실에선 길쌈을 할 때 씨줄을 당기던 바디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관장은 “일꾼들이 쓰던 막사발들이 꾸밈없어 아름답다”고 했다. 정재(부엌)와 살강(찬그릇 장)들, 솥뚜껑에선 “어머니”가 느껴졌고, 빗자루와 나무흙손 등엔 “농부들의 손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항아리가 깨지면 철사로 테를 메워 썼어요. 이런 것이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런 문화를 거쳐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싶은 겁니다.” 봄 전시실에 전시된 물동이와 똬리, 닳고 닳은 주걱, 조청을 담던 꿀단지, 나무하러 갈 때 쓰던 도시락 등 “영 촌스러운 것”에도 은은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이 관장은 막사발 등 비슷한 종류의 생활용품을 대량 수집한 이유를 묻자 “못난 사람일수록 수가 많아야 힘이 생긴다”며 웃었다. (062)222-6668.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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