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강원 춘천 근화동 정재원 어르신 집에서 금병초 4학년 학생 28명이 연탄나르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제 이름은 ‘연탄’입니다. 얼굴엔 22개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이 구멍에서 시뻘건 불길을 내뿜어 주위를 따뜻하게 합니다. 키는 14.2㎝밖에 안 되고, 몸무게도 3.3㎏에 불과하죠. 몸값은 겨우 573원입니다. ‘껌값’도 안되는 셈이죠.
하지만 50여년 동안 겨울철 서민들의 따뜻한 아랫목을 책임져왔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달동네에 사는 홀몸 어르신들도 연탄 4장만 있으면 하루를 뜨뜻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구멍탄’이었습니다. ‘구멍이 있는 탄 덩어리’라는 뜻이죠.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혹은 19공탄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러다 1961년 정부가 연탄규격을 처음으로 정하면서 ‘연탄’으로 개명을 했죠.
고향은 일본입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선 주먹 크기의 석탄에 구멍을 뚫어 가정에서 숯 대신 사용했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모양이 연꽃 열매를 닮았다고 ‘연꽃 연탄’으로도 불렸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 일본인이 운영하던 웅본상회가 수타식(틀에 탄을 넣은 뒤 메로 쳐서 제조하는 방식)으로 연탄을 만들어 한국에 있는 일본인 가정에 판매하면서 한반도에 연탄이 처음 알려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생산량은 극히 적었습니다.
제가 유명인사가 된 건 해방 뒤 1956년 전국으로 연결된 석탄산업 철도의 개통 덕분입니다. 이후 산림녹화 정책 등으로 나무 대신 연탄 사용이 장려되고 1970년대 농촌 지역까지 보급되면서 연탄이 가정용 핵심 연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릴 적 추운 새벽에 부모님이 연탄집게를 들고 연탄을 갈던 모습을 다들 기억하시죠? 연탄불에 익혀 먹던 가래떡과 심심찮게 들려오던 연탄가스 중독 뉴스까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에게 잊히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무렵입니다. 석유와 가스 등 새로운 연료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유가 안정과 국민소득 증가, 대단위 아파트 건설, 서울올림픽 개최에 따른 환경규제 등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죠. 민간 부문의 석탄소비량도 1986년 2425만t으로 최대치를 찍은 뒤 지난해 148만t까지 급감했습니다.
제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8년 9월 리먼 사태 덕분입니다. 리먼 사태로 세계 경제가 출렁였고, 원유 등 각종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퇴출 위기에 놓인 ‘국민연료’에서 ‘서민연료’로 다시 태어난 셈이죠.
요즘 세상에 연탄을 쓰는 가구가 얼마나 되겠느냐고요? 연탄은행이 2014년 5월부터 4달 동안 전국 연탄배달업자와 연탄사용 가구 등을 상대로 직접 연탄사용가구를 조사한 현황을 보면, 16만8373가구가 연탄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10일 오전 강원 춘천 근화동에 살고 있는 정재원 어르신이 텅 비어있는 연탄 창고를 가리키고 있다. 춘천/박수혁 기자 psh@hani.co.kr
문제는 이들 가구의 81%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이거나 차상위 가구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2005년 경기도 광주에서 한 여중생이 단전된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자다 불이 나 숨진 안타까운 일이 있었죠. 2012년에도 전남 고흥에서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자다 불이 나 할머니와 손주가 숨진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에너지 빈곤층(에너지 구매비용이 가구 소득의 10% 이상인 가구)’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연탄은행은 이런 에너지 빈곤층을 돕기 위해 2002년 허기복 목사가 만든 민간단체입니다. 원주연탄은행에서 시작돼 전국 31곳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까지 퍼져 에너지 빈곤층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허 목사의 얼굴에도 깊은 시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지난해까지 6년 동안 장당 500원에 묶인 연탄 소비자 가격이 7년 만에 573원으로 14.6%나 인상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업·개인 등의 후원도 지난해에 견줘 크게 줄었습니다. 전국 연탄은행 31곳이 10월 한 달 동안 확보한 연탄은 25만장으로 지난해(40만장)에 견줘 37.5%나 줄었습니다. 연탄으로 가득 차야 할 보관 창고가 텅텅 빈 셈입니다. 연탄은행은 오랜 경기침체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 침체, 청탁금지법 시행에 따른 기업 등의 기부 회피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저를 환하게 반겨주는 달동네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정부는 지난 6월 대한석탄공사에 대한 단계적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석탄공사가 보유한 탄광 3곳을 단계적으로 감산하고 정원을 축소하겠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사실상 폐업 수순’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석탄공사 소속 탄광들이 국내 연탄 재료의 절반이 넘는 58%를 공급하고 있는데 생산량을 줄이거나 폐업을 하게 되면 연탄을 더는 만들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수입 석탄이 연탄에 15% 이상 섞이면 쉽게 부서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석탄 공급량이 줄면 가격도 오를 수도 있겠죠. 실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김규환 의원이 지난 국감에서 제기한 자료를 보면, 석탄공사 구조조정으로 서민층이 사용하는 연탄 수요가 2020년이면 약 41만t 정도 부족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촛불’을 켜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연탄이 밥보다 더 중해! 연탄이 3장만 남아 노심초사했는데, 연탄배달 봉사하러 온 어린 학생들이 내겐 천사야” 10일 오전 강원 춘천 근화동에서 만난 정재원(72) 어르신의 말씀입니다. 연탄 한장에 573원. 아직 가치가 있습니다.
춘천/글·사진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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