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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본 충북도청 앞 촛불] 거리에 선 붉은 마음

등록 2016-11-20 15:54수정 2016-11-20 19:11

정민
시인·충북작가회의 부회장
19일 충북도청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충북 범도민 시국대회에 나선 정민 시인.
19일 충북도청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충북 범도민 시국대회에 나선 정민 시인.
날이 흐리다. 어두워지고 있다.

19일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 추모 연극 <선택>을 보고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나는 지금 청주 충북도청 앞 거리로 가고 있다. 가는 내내 단재의 대사 한 마디가 이명처럼 울리고 있다.

“내 선택은 오로지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6시가 조금 넘었다. 도청 앞 도로는 촛불과 손팻말을 든 시민들로 가득하다. 차들은 옆길로 돌아가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다. 상당공원에서 육거리까지 300여m의 길이 원래는 사람의 것이었다 듯 노래와 함성으로 출렁거린다.

한 시간 넘게 진행된 1부 행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무대에 오른 영세자영업자의 목소리는 하소연에서 절규로 이어졌다. “아마도 영세자영업자가 30%는 될 겁니다.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든데, 박근혜 정권은 재벌들만 배를 불리고 있어요. 정말 죽고 싶습니다.”

촛불을 켜 들고 거리 행진 대열 속으로 들어간다. “하야가”를 합창하는 시민들의 어깨춤이 흥겹다. 출렁이는 촛불과 나부끼는 깃발도 흥겹다. 성안길 입구를 지나 중앙공원을 거쳐 석교동 육거리까지, 청주 시내를 빙 에둘러 돌아간다. 눈가루처럼 비가 흩어져 내린다.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 있던, 상가에 있던, 어딘가로 가고 있던 시민들의 시선이 모인다. 잠시 멈추어 바라보거나 문을 열고 나와 손을 흔들거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나같이 웃고 있다. 박수를 쳐 주는 이도 있다. 멈칫거리다 아이의 손을 잡고 행진 속으로 들어오는 이도 있다.

“바람불면 횃불 된다”, “바람불면 들불 된다”, “박근혜 퇴진”, “새누리 해체”, “전경련 해체”, “재벌도 공범”, “정우택 사퇴”, “박근혜 구속” 등의 구호와 함성과 노래가 청주 시내를 한 바퀴 돌며 비 사이로 어둠 속으로 퍼져 울린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행진 물결이 육거리에 이르렀다. 사람이 모여 육거리를 모두 메웠다. 여섯 개로 갈라지는 길이 하나의 광장이 되었다. 1만 명이라고 한다. 모두가 걸어서 여기에 모였다. 새누리당 정우택 국회의원의 사무실 앞에 2부 행사를 위한 연단이 차려져 있다.

한 아주머니가 나선다. “내가 박근혜에게 정치하라고 권유하고 대통령 선거 때 투표도 했는데 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배신하면 안 됩니다. 박근혜 찍어서 미안합니다.”

대학생은 “대통령님께”로 시작되는 편지를 천천히, 힘주어 읽는다. “…불우하게 살아온 대통령님 글을 읽고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열심히 살면 잘 살 수 있다는…그것이 다 거짓말입니다…지금 당장 퇴진해야 합니다.”

다른 중학생은 “저는요 수업 시간에 잠만 자는데요, 도대체가 참을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나오게 되었어요. 화가 나서 지금은 국사 시간에 잠 안 자고 공부해요.”

직장에 연가를 내고 증평에서 왔다는 중년의 남성은 목이 완전히 쉬었다. “먼저 여기까지 온 학생들한테 미안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런 세상밖에 만들지 못해서…, 이 자리를, 이 마음을 절대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날카로운 중년은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을 비판한다. “박근혜와 새누리당, 친박을 넘어 순박인 정우택이 이렇게 뻔뻔합니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도 여기 사무실 간판 불을 버젓이 켜놓고…이번 국정농단에 대해서 청주시민을 우롱하는 정우택은 당장 사퇴해야 합니다.”

한 젊은이는, “바로 여기가, 우리가 이렇게 모여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잘못된 것을 절대 잊지 말고 우리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하고 호소한다.

엊그제 수능을 봤다는 여학생들은 평범하게 공부하는 것이 바보 같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친구들과 여기 나오는 것을 얘기했는데요, 무섭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어요. 엄마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어요. 엄마 미안해요, 하지만 정유라처럼 돈으로 부정입학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가 없어요.”

한 여성은 “박근혜 퇴진” 대신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중학생이 나선다. “대선 때 박근혜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 최순실이 준비한 대통령이었어요…….” 초등학생이 나선다. “그네는 혼자 움직이지 못해서 바람이 순실순실 불어야 한대요. 거짓말쟁이 대통령은 하야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발언을 들을 때마다 광장의 시민들은 촛불과 팻말과 깃발을 들어 공감하고 한 목소리로 외친다. 이것이 ‘함성’이구나, 내 온 신경이 긴장된다.

9시가 넘어 사회자가 다음 모임을 기약하고 오늘 집회를 정리한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광장이 다시 여섯 개의 길로 돌아온다. 거리는 비었다. 그 빈 거리에 오늘 모였던 만 개의 붉은 마음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그들의 선택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선택은 오로지 진실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거짓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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