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제18대 대통령이 되기 전 박근혜 후보가 내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구호는 애초부터 시민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지극히 아름답고 포부가 실린 말이지만 그 구호의 주어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기어이 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거의 매번 주어가 상실된 문장 속에서 대통령과 시민들은 동문서답 사이에서 서로의 길이 엇갈렸다. 슬픈 희극은 그렇게 시작했지만 언제나 그런 희극은 비극으로 끝이 났다.
현직 대통령이 ‘단순 참고인’을 넘어 ‘상당 부분 공모혐의’라고 검찰은 어렵게 말했지만, 광장은 이미 대통령이 ‘사실상 주범’임을 지목하며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아직은 이 땅에 한 줄기 빛이 남아 있는 것일까? 시민들은 속임수와 협잡과 특권과 반칙으로 누더기 되어 버린 이 땅에 진저리치고 좌절하면서도 빛을 찾아 광장으로 모였다. 시민들은 스스로 동방박사 되길 자청하지 않았지만 어둠이 가득한, 칠흑 같은 세상 속으로 그들은 빛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이었다. ‘희망’이라는 빛, ‘함께’라는 빛은 ‘욕망’과 ‘야합’이 이미 삼킨 듯했지만 시민들은 용케도 어둠의 족속들이 숨기고 감추어 놓은 그 빛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스스로 그 희망의 빛이 되고자 했다.
광장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축제를 앞둔 듯 경쾌했고, 주름진 얼굴의 사람들은 시대의 잘못을 속죄하는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광장의 시민들은 그들 모두가 한 몸으로 된 물결 속에 있으며 새로운 날은 이미 그 물결이 당기고 있음을 이심전심의 표정에 담았다. 네 살배기 아이를 둔 젊은 부부는 생전 처음 촛불과 광장의 문화를 체험한다면서 “속았어요”라는 한마디로 그들의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 수고가 많다고 인사를 건네자 사복경찰 공무원은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낮게 심지 깊은 말을 되돌려준다. 그의 손에 들린 무전기가 촛불처럼 보였다. “더 안 줘도 되니까 괴롭히지만 마라”고 노동자는 말하고, 청바지의 소녀는 “권력과 돈을 탐내는 어른들이 부도덕해요”라고 쏘아대듯 말한다. 시인에게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촛불이 되어 어두운 광장이 환해졌다. 촛불은 이내 썰물과 밀물이 되어 광장을 희망의 바다로 만들었다. 그 바다는 “퇴진하라, 퇴진혜”라는 파도소리를 오래도록 쏟아냈다.
어둠의 세력들이 말끝마다 내세우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란 마음에도 없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들, 어쩌면 스스로 환각상태의 말들을 했지만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나오는 ‘국민’은 ‘그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일당’만을 지칭한다는 것을. 어둠의 세력들은 역사의 악취 나는 구석을 덮고, 지우고, 꾸며서 교과서를 새로 쓰고 싶어 했지만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수군거림은 결국 촛불의 역사를 불렀던 것이다. 지워지지 않는 폭정에 대한 시민의 저항으로 촛불혁명을 이루는 역사를 지금 여기서 쓰게 하는 것이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라고 또는 문화행사 같은 비폭력 집회가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느냐고 벽창호들은 버텼지만 바다는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하는 세상의 단순한 근본을 그들은 몰랐다. 인류의 역사, 시민의 역사는 늘 그런 세력들을 ‘어둠’ 혹은 ‘악’이라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용케도 오래도록 대물려 가면서 그것을 기억했다.
시민들을 참담하게 하는 길라임의 비극은 이쯤해서 막을 내리면 어떨까? 이미 잡혀간 심복들이 “대통령이 시켜서” 했다고 자복하는 일이나, 범법행위가 뚜렷한 사람을 대한민국의 수장으로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그것은 슬픈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주권을 도둑질 당했지만 작은 촛불의 연대 속에 그 아픔을 서로 달래며 새로운 희망을 시민들은 광장에서 발견하려 했다. 그 희망이 소수의 일당들이 만든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음을 믿고서 시민들은 동방박사가 되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경남시국대회 마무리에 나온 고등학생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의가 바보 되지 않는 세상에서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