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사별하고 대학생의 학부모가 된 선배 K형과 마주쳤다. 장장 십수년 만에, 민중가요를 참 잘 불렀으나 지금은 많이 늙어 뵈는 노동자 P형과도 해후했다. 전날도 만났던 5·18 기념재단의 Y형과는 잠깐 악수했고, 놀랍게도 금남로를 가득 메운 군중들 속에서 은퇴한 스승 L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들만은 아니었으리라. 주최측 추산 7만 여명이라고 했으니, 그 안에 모두 다 있었으리라. 29년 전, 그러니까 1987년 6월 내내 이 거리에서 온 몸에 최루탄을 뒤집어쓰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던 그 사람들 말이다.
같은 시간, 역시 군중들 속에 있었다던 S형이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몸이 노래와 몸짓을 기억해내더라’. 참 적절한 말이었다. 기억은, 지난 29년간 책장을 넘기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 최적화되어 버린 줄로만 알았던 내 팔뚝으로부터 돌아왔다. 언제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광주 출정가>와 <민중의 노래>를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입술로부터 돌아왔고, 광장 분수대 위에서 타오르는 횃불의 매캐한 연기 냄새를 반기는 코로부터 돌아왔다. 신체가 정치적으로 재구성되는 듯한 느낌, 그것은 감격적인 기시감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기시감 덕에 우리는 지지 않을 거다’.
1987년 6월 하순의 어느 날, 금남로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수십만의 시민들과 함께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해 본 사람은, 그 순간의 기이한 감각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충만감, 그저 분노라고만 부르기에는 이상할 만치 정당한 관용, 격하게 뛰는 심장에도 불구하고 마치 역사처럼 지치지 않던 다리,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체온의 합이 만들어내던 무방비의 연대감, 그런 것들은 몸에 각인되어 영원한 획득형질이 된다. 비유로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1987년 6월의 경험은 우리 세대에 대해, 그 신체에 대해 ‘구성적’이었다. 그 획득형질이, 29년 하고도 다섯 달이 더 지난 2016년 11월 19일 밤, 금남로에 돌아온 K와 P와 Y와 L과 나와 그리고 익명의 무수한 시민들의 몸속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광주다. 다른 도시가 아니라 1980년 5월을 겪은 광주다. 나는 어디선가 ‘광주’라는 기호의 의미를 ‘순간적이었던 절대공동체의 경험과 그 이후의 긴 상실감 사이에 벌어진 틈’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것을 잃어버렸다고 상상하는 사람들, 그들이 광주 시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항상 5·18이라는 획득형질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고, 따라서 최소한 정치에 대해서라면 기대치가 ‘항상-이미’ 높다. ‘절대공동체’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던바, 그 어떤 정치도 1980년 5월의 광주보다 더 정치적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미 겪고 획득형질로 체화해 버린 시민들 7만이 다시 금남로 민주 광장에 모였다면, 이것은 쉽게 끝날 싸움이 아니다. 게다가 저 예쁘고 장한 아이들을 보라!
생물학적으로 말해 획득형질은 유전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건대, 역사적 진실은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무대에 올라 자유 발언을 하는 시민들 중 절대다수가 청소년들이었다. 수능 끝난 고교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다섯 살 된 동생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엄마가 첨삭만 해준 문장들을 또박또박 읽고 내려오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고귀했는데, 말하자면 획득형질이 유전되거나 교육되고 있었다.
회고해 보자니, 4·19에서 5·18로, 다시 6·10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기시감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 수많은 촛불들이 있었을 리 없다. 이겨 본 적 있는 자들이 대체로 승리를 확신한다. 몸에 새겨진 저항과 승리의 기억은 민주주의의 무기다. 그러니 저 용감하고 어여쁜 아이들의 신체를 승리해 본 적이 있는 자들의 몸으로 만들어야겠다. 숱한 시민들의 팔과 다리와 입에 다시 정치적인 피가 돌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