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내 몰래 <한겨레> 주식을 구입했습니다. 월세로 사는 형편이라 아내와 상의하면 반대를 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집안 모임에서 아내가 알았지만 저를 신뢰하기 때문에 다툼은 없었습니다.”
지난 2일 전북 정읍시 상동 우미타운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만난 송이수(51) 소장의 말이다. 그는 29년 전 <한겨레> 창간 당시에는 20대 초반이라 성금을 낼 상황이 아니었다고 했다. 탄핵정국에서 한겨레신문 주주모집 광고를 보고 100주를 구입했다.
오래전부터 <한겨레>를 구독한 그는 <한겨레>가 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종합일간지 가운데 한글 가로쓰기를 처음으로 시도한 <한겨레> 덕택에 자식 이름도 한글로 지었다. 국한문 혼용과 세로쓰기가 대세인 1980년대 언론 환경에서 한글 가로쓰기는 파격이었다. 군복무 중인 첫째는 ‘시원’(남자답게 시원하게 커라)이고, 중학생인 둘째는 ‘기찬’(기가 차고 씩씩하게 자라라)이다. 송 소장의 5남1녀 형제들도 대부분 <한겨레>를 구독한다.
아파트 공고문을 자주 써야 하는 관리소장 직책상 <한겨레>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신문에서 글을 쉽게 쓰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뜻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바빠 신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주말에 몰아서 본다. 특히 주장이 선명한 사설을 주로 읽는다.
가치관이 좋은 든든한 친구가 주변에 있으면 닮아가고 싶은 것처럼, <한겨레>는 자신에게 그런 존재라고 칭찬했다. 배고프면 음식을 사먹듯이, 정신적인 양식을 위해 신문도 보는 것인데,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한 요즘 세태에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겨레>의 따뜻한 기사가 좋다고 말했다. 또 정권을 향한 매서운 질책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를 보면서 “옛날 같으면 잡혀갈 텐데”라며 은근히 걱정도 했단다.
“지금처럼 <한겨레>가 꿋꿋한 모습을 계속 지켰으면 좋겠어요. 너무 강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바르고 쓴 소리를 제대로 하는 매체가 있어야 합니다. 국정농단 사태가 촛불로 타올라 대통령 탄핵심판까지 이어진 것은 제대로 정권을 감시하는 언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그는 <한겨레>에 대한 아쉬움을 묻는 질문에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강소기업을 많이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소기업은 마케팅 여력이 부족해 홍보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강소기업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으면 좋은 제품을 독자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읍 출신으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1999년 고향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일도 돕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전철이 끊긴 뒤 막차 시내버스를 타고 동료 집으로 함께 가다가 비둘기가 고가도로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귀향을 생각했다. “날개도 있는 비둘기 너는 왜 이 도시에 있느냐. 서울에서 바쁘게 사는 나의 삶은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식구들과 고향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을 선택했다.
“<한겨레> 주식을 산 것은 자식들에게 더 나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론이 제대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읍/글·사진 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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