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의 농촌복지공동체 여민동락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르신들.
“어르신들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아, 우리가 10년 동안 잘못 산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요.”
전남 영광군 묘량면의 농촌복지단체인 ‘여민동락공동체’ 권혁범(44) 센터장은 17일 “설립 10주년 행사를 한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더라구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맹자의 ‘여민락’(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에서 이름을 따 지은 여민동락은 학생운동을 하던 젊은 청년 부부 3쌍이 귀촌해 2007년 귀농한 뒤 이듬해 5월 설립한 노인복지시설로 출발했다. 여민동락은 18일 오후 3시 묘량중앙초등학교 장암관에서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 기념 회원&후원의 날’ 행사를 연다.
1997년 제5기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을 지낸 강위원(46)씨와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권 센터장 등 6명은 강씨의 고향인 이곳에 건평 175㎡(53평) 규모의 건물 2개 동을 지어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 청소하고 빨래해주는 등 방문요양 활동과 주간보호센터를 시작했다. 지금은 12명의 노인을 주간에 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건물 앞 1개동은 ‘주인 없는 시골 찻집’으로 꾸몄다. 6명으로 출발한 여민동락의 식구는 이제 16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농업, 농촌, 농민과 함께 생명, 평화, 자치의 원칙으로 땅, 사람, 마을을 살리는 ‘지역일체형 공동체’를 지향하며 마을에 필요한 여러 사업을 펼쳐왔다.
여민동락 마을활동가들은 `동락점빵'이라는 상호를 단 탑차를 끌고 마을 곳곳을 찾아 ‘이동 5일장’을 펼친다.
“설립 10주년 행사를 한다고 인사드리러 갔더니, 마을 어르신들이 폐교될 뻔했던 학교를 살린 일이나 마을의 변화를 말씀하시더라구요.” 권혁범 센터장은 “처음엔 마을 어르신들이 ‘2년 정도 살다가 떠날 젊은이’들로 알았었다”며 “그래도 짧지 않은 시간 어르신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지역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여민동락은 자립형 농촌복지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민동락은 2011년부터 마을회관과 경로당 2곳에서 ‘농한기 마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민희 사회복지사는 “농삿일이 덜 바쁜 철에 마을 경로당에 어르신들이 모여서 건강체조, 미술치료도 받으시고 한글교실에도 참여한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밥을 같이 해 먹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말했다.
어르신들의 건강한 노후와 생활 자립을 돕기 위한 일자리 사업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협동조합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동락점빵 사회적 협동조합’은 4명의 식구들이 1.5톤짜리 탑차를 몰고 42개 마을을 돌며 생필품을 판매한다. 일종의 ‘이동 5일장’이다. 화장지·비누 등 생필품과 콩나물·두부·고등어 등 식재료를 판매한다. 하지만 ‘이문’(수익금)을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혹 수익이 나면 협동조합에 출자한다. 권혁범 센터장은 “어르신들이 생필품을 사기 위해 반나절이나 걸려 읍에 나가셨다가 반나절 걸려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이동 편의점을 연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삶 사회적 협동조합’은 영광의 대표적 특산품인 모싯잎 송편을 생산해 판매한다. ‘여민동락 할매손 모싯잎 송편’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판매돼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 지역 농산물을 소규모로 수매해 가공한 뒤 도시민들에게 판매하는 일도 한다. 3명의 식구들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송편도 만들고 모싯잎 밭농사도 함께 지으면서 일자리를 만들어 드린다.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도 여민동락의 10년 사업 중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성과이다. 이들은 2009년 폐교 위기에 놓인 묘량중앙초 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학생 유입 등의 노력을 통해 2012년 학생수가 34명까지 늘면서 통폐합 대상에서 공식 제외됐다. 지금 묘량초 학생 수는 63명으로 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사람과의 관계 문제였다. “농사짓는 것은 서툴러도 배운다고 생각하니까 어렵지는 않았어요.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 문제였어요. 공동체 내부 구성원들도 다양한 색깔이잖아요? 그래서 서로 배려하며 사는 것이 숙제였고요…. 그리고 지역에서 형님들 만나서 사업을 함께 도모해 정착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면 하나둘씩 잘 풀어내려고 했어요.”(권혁범 센터장)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여민동락 식구들.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기념 회원&후원의 날’은 10년 동안 묵묵히 동행해준 후원회원들을 위한 감사의 자리이기도 하다. ‘세상을 품고 마을로, 마을을 품고 세상으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엔 전국의 후원회원들과 지지자들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여민동락의 마을복지사업, 작은학교 살리기 운동, 협동조합 활동, 노인 일자리 사업 등에 함께해온 마을 주민들이 이번 설립 10주년 행사를 위해 길놀이, 사물놀이, 합창공연, 민요공연을 준비한다. 50년 동안 농사를 지으신 어르신들에게 ‘우리 마을 농사문화재’ 배지를 달아드리고, 존경과 감사의 헌사도 올린다.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을 기념해 대표살림꾼 강위원씨가 쓴 책 <기적 아닌 날은 없다>의 출판기념회도 이날 연다. 강위원 대표살림꾼은 “처음부터 10년은 보고 일하자 했다. 10년 안에는 판단조차 하지 말자 했다. 10년 동안은 회원의 날도, 후원의 밤도 갖지 않고 버티고 견디며 ‘살아내자’ 했다”며 “날마다 낮아지고 날마다 실패하며 나아가는 일이 공동체의 길이다. 미래 10년은 공동체의 성숙, 주민의 존엄, 마을의 진보가 어떻게 완성돼 가는지를 확인하는 순간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밝혔다. (061)353-1141.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여민동락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