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23명 중 안종락 선생 사진 입수
순국열사 중 얼굴 첫 공식 확인
일본군이 불지른 집 잿더미서 나와
가보로 보관해오다 고손자가 공개
23명 중 안종락 선생 사진 입수
순국열사 중 얼굴 첫 공식 확인
일본군이 불지른 집 잿더미서 나와
가보로 보관해오다 고손자가 공개
98년 전인 1919년 경기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제 강점에 맞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제암리교회에서 학살당한 23인의 순국열사 중 안종락(사망 당시 54살·왼쪽) 선생의 생전 사진이 공개됐다. 제암리 23인과 인근 고주리 6인 등 1919년 화성 독립만세운동으로 숨진 순국열사 중 얼굴 사진이 공식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화성시 산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순국기념관)’은 26일 “지난해 제암리 23인의 순국열사 자료 조사 중 안 선생의 고손(4대) 안효남(현 제암리 거주)씨가 안 선생의 사진 소장 사실을 밝혀 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순국기념관 쪽은 “안 선생의 고손자의 어머니가 시어머니로부터 고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와 함께 사진을 전해 받아 소중하게 가보로 보관해왔다”고 밝혔다. 사진은 1910년대(추정) 안 선생이 아버지(안상옥)와 함께 찍은 것이다.
농사를 짓던 안 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나섰다가 그해 4월15일 제암리 자신의 집에서 일가 친척 6명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 나와 제암리교회에서 살해당하는 등 일가족 6명이 참변을 겪었다. 사진은 학살 뒤 일본군이 불지른 안 선생 집 잿더미 속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뒤 같은 달 31일 발안리에서 3000여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화성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급격히 퍼졌다. 4월2일 제암리 주변 산 위 80여곳에서 봉화가 피어오르고 3일에는 장안·양정면사무소와 화수경찰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인 순사가 살해되자, 일본군은 ‘주모자를 찾아 박멸하고 소굴을 뒤엎으라는 폭동진압 명령’을 내렸다.
제암리 학살 사건의 참상은 당시 일본군의 기록에도 생생하다. 제암리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아리타 중위에 대한 조선군 용산 육군군법회의 판결문(1919년 8월21일)을 보면, ‘아리타 중위는 4월15일 제암리 및 고주리의 폭도 가운데 가장 악질인 자로 인정되는 예수교와 천도교 두 교도를 소탕 토벌하기 위해 부하 11명을 데리고 가 예수교회당 및 부근 빈터에 제암리에 사는 남자 21명과 고주리 남자 6명을 불러 모아 사살 또는 찔러 죽이고, 제암리 교회당과 제암리 가옥 27호를 불태우는가 하면 반항하는 부녀 1명을 총으로 쏴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돼 있다.
순국기념관 이혜영 선임연구위원은 “당시 일본은 아리타 중위의 제암리 학살행위는 임무 수행을 한 것일 뿐 범의(犯意)가 없다며 무죄 판결했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촉구하기 위해 자료 발굴과 연구로 제암리 참상의 진상을 상세히 밝히는 것이 급선무다”고 말했다.화성/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사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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