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와 추모관 마당에서 사람들이 생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우리는 나이 많은 할매들이라가 그런 거 모르니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 두명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날씨와 구미 경제 이야기를 한참 거쳐 마침내 할머니들은 분한 목소리로 탄핵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탄핵 뒤 첫 주말인 12일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만난 할머니들이다.
“박정희 대통령 지가 어렵게 살아서 국민들 어떻게든 밥 먹일라고 얼마나 애를 썼어요. 내가 박정희 대통령 살아온 거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서 막걸리 한잔 잡수시고 된장에 풋고추 찍어가 안주하고 그랬어. 부모 잘 만나가 잘 먹고 잘산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모르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함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이내 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으로 바뀌었다.
12일 오후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와 추모관 마당에서 사람들이 생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나라를 일으켜 세운 건 박정희 대통령인데, 끝에 가서 딸이 조져 놨으니께 기가 맥히잖아”, “부모는 총 맞아 죽고 의지할 데가 없어가 최순실이하고 그칸 거 아이가”, “믿어가 그래. 저거 아버지맨치로 독하게 했어야 하는데”, “내가 저기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 가서 박근혜 대통령 잘 봐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탄핵됐다는 소리 듣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다 나더라”. 할머니들은 진한 동정에 원망과 회한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12일 오후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와 추모관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 벽에 ‘박정희로 107’이라고 적힌 도로명주소 표지판이 걸려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박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왼쪽 길을 따라 30m를 가니 보릿고개체험장, 민족중흥관, 박 전 대통령 생가, 추모관이 잇따라 나왔다. 지난해 1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화가 난 백아무개(49)씨가 추모관에 불을 질렀다. 구미시는 화재보험금 5400만원에 1400만원을 보태 지난달 27일 추모관을 다시 세웠다.
추모관 입구 왼쪽에 놓인 방명록에는 이날 방문객 42명이 글을 남겼다. ‘따님이 안타깝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주십시오’, ‘박근혜 대통령님 힘내세요’ 등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안타까워하는 글들이었다.
12일 오후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관 입구에 놓인 방명록에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주십시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생가 주변에서 만난 도기광(78·구미시)씨는 “대통령이라는 게 최순실이한테 업혀가 잘한 거 없다. 애비가 잘했으니 딸도 애비한테 배운 게 있어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뽑아줬는데 열이 받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얼굴에 똥칠했다고 사람들이 다 그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부모도 잃고, 시집도 못 가고, 형제들도 좀 그렇고 불쌍한 사람이다. 최순실이가 박근혜 신세까지 다 조져놨다. 박근혜가 잘못한 건 맞지만 탄핵은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득표율 51.6%로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북 전체에선 80.1%, 대구에선 80.8% 득표율을 기록했다. 구미에서도 득표율 80.3%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탄핵돼 쫓겨나는 첫 대통령이 된 현실 앞에서 한때의 일방적 사랑은 애증과 회한, 동정, 비난이 뒤엉켜 복잡해졌다.
박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300m를 가면 공원이 나오고 그 안쪽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있다. 5m 높이 동상은 2011년 11월14일 구미시민들이 6억원을 모아 세웠다. 지난해 11월4일 류아무개(20)씨가 동상 다리 등에 붉은색 페인트로 ‘독재자’라는 글씨를 적었다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공원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안쪽에 있는 동상을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2일 오후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주변 공원 안쪽에 박 전 대통령 동상이 서 있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
구미에서도 젊은이들의 탄핵 정서는 달랐다. 공원에서 만난 이재은(20·구미시)씨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것을 보고 정말 기분이 좋았다. 다른 친구들도 ‘드디어 탄핵됐다’면서 함께 기뻐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성실하게 조사받았다면 탄핵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욱(20)씨도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뭔가 한 게 없는 거 같아 싫었는데 탄핵은 잘됐다고 생각한다. 사과할 때는 언제고 얼마 뒤 바로 얼굴 바꿔서 잘못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정말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구미/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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