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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슬픈 배 품었던 팽목항 ‘통절의 3년’을 되감으며

등록 2017-03-29 19:32수정 2017-03-29 22:15

1080일 만에 세월호 떠나보내는 진도 팽목항

세월호, 30일 목포신항 향해 반잠수정 실린 채 출발
유족과 미수습자 가족, 온 국민의 눈물 고인 그곳
참혹한 일이 난 지 3년. 그동안 세월호를 품고 있던 팽목항이 이제 그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세월호를 목포신항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29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은 서원대 학생들이 추모펼침막과 상징물이 설치된 방파제를 둘러보고 있다. 진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참혹한 일이 난 지 3년. 그동안 세월호를 품고 있던 팽목항이 이제 그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세월호를 목포신항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29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은 서원대 학생들이 추모펼침막과 상징물이 설치된 방파제를 둘러보고 있다. 진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전남 진도 팽목항이 30일 세월호를 떠나보낸다. 참사가 발생한 지 1080일 만이다. 팽목항은 지난 3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였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안타까움이 녹아든 공간이었다. 이 항구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픔의 공간이었지만 누구나 아직 눈물이 남아 있고, 공감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현장이기도 했다. 여태껏 항구를 지켰던 이들은 이날을 차갑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새봄을 열고 새 꿈을 꾸는 출발점으로 삼기를 고대하고 있다.

팽목항은 사고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육지다. 이 항구는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0분 참사 발생 이후 3년 동안의 분노와 좌절, 희망을 공간 곳곳에 새겨왔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피울음, 주검을 수습하는 포르말린 냄새, 노란 리본을 두른 등대, 하늘로 띄워 보낸 1000개의 풍선 등이 항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자리를 잡았다.

참사의 충격으로 멈춰섰던 팽목항의 시계는 지난 23일 세월호 선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월호 선체는 운명처럼 머무른 맹골수도를 떠나 목포신항으로 향한다. 미수습자 가족들도 출항에 맞춰 팽목항을 떠난다. 세월호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목포신항으로 옮긴다. 응원하던 진도주민들도 29일 안전한 이송과 미수습자의 온전한 귀환을 기원했다. 주민들은 “무정한 세월호야, 가려거든 너만 가지, 정든 임 정든 아이 무삼일로 다려갔나(데려갔느냐)”라고 슬퍼하며 배웅했다. 주민들은 세월호를 보내지만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항구 인근에 추모공원과 해양안전관을 조성하기로 했다.

팽목항은 세월호를 보내지만 돌아오지 않은 9명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분향소와 방파제를 찾은 이들이 남긴 추모글들은 항구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줘요.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이영숙, 권재근·혁규님.”

■ 슬픔…
팽목항은 참사 당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경기 안산에서 내려온 부모들은 뒤집힌 선체를 보고 울부짖었다. 구조된 아이들에게 입힐 옷가지를 품에 안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골든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야속하게도 세월호는 깊이 44m의 해저로 가라앉고 말았다. 에어포켓과 다이빙벨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바다에서 살아온 아이는 없었다. 구조되지 못한 아이들은 차가운 주검으로 항구에 들어왔다. 항구는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통곡이 끊이질 않았다. 주검이 항구로 들어올 때마다 어떤 이는 까무러쳐 혼절하고, 누군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슬픔에 공감하는 수십만명이 항구로 몰려왔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이들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함께 기다렸다. 끼니를 차리고 숙소를 챙겼다. 이름도 없이 헌신하는 이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해 11월11일 수색이 중단되자 항구는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항구 들머리 터 9900㎡에 노란 리본을 두른 울타리가 쳐졌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이곳에 설치된 임시주택 10동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방파제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그날을 잊을 수 없다며 타일 4656장으로 ‘기억의 벽’을 만들었다. “따뜻한 밥 함께 나누고 싶다”, “아이들아 보고 싶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등 가족들을 응원하는 펼침막들이 설치됐다.

길이 170m의 방파제 안에는 ‘기다림의 의자’, ‘기다림의 등대’, ‘하늘나라 우체통’ 등 다양한 조형물도 자리를 잡았다. 참사의 아픔을 기억에 새기기 위한 흔적이었다.

■ 분노…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무능한 해경과 받아쓴 언론에 분노했다. 국민들도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정홍원 총리에게 물병이 날아가고, 박근혜 대통령에겐 7시간의 행적을 물었다. 항구는 2015년 참사 1주기 때 박 대통령의 방문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인양을 회피하던 박 대통령이 분향소를 찾아오자 가족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숙소를 비웠다. 박 대통령은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해 항의 시위를 틀어막았다. 방파제 입구에 경찰력을 배치한 채 추도사 영상만 찍은 뒤 달아나다시피 자리를 떴다. 팽목항을 찾아온 인사 가운데 가장 매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차례 눈물을 흘리며 담화문을 낭독하고 불문곡직 해경을 해체한 뒤 더는 세월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팽목항에서 비롯된 분노는 광화문으로, 안산으로 자꾸만 확산되어 갔다.

■ 기다림…
정부가 수색을 중단했어도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은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숙소를 애초 있던 진도체육관에서 팽목항 들머리로 옮겼다. 항구는 이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이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성당·교회·법당을 열었다.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광화문까지 걸었다. 어떤 이들은 3보1배로 가기도 했다. 항구는 어느 틈에 온 국민이 미수습자를 기다리는 공간이 됐다. 지난해까지 끝내겠다는 인양은 여섯 차례나 연기됐지만 기다림은 이어졌다.

1000일이 지나고 3주기가 다가올 무렵 박 대통령이 헌재에서 파면됐다. 사납던 맹골수도도 잠잠해졌다. 이윽고 거짓말처럼 세월호가 바다 위로 올라왔다. 항구는 지난 23일 새벽 침몰 1073일 만에 수면으로 빼꼼히 올라온 세월호를 만날 수 있었다.

진도/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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